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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박물관은 왜 떨떠름할까

일본 교토의 류코쿠 뮤지엄과 니시혼간지

한국인에게 유명한 일본의 사립대학은 많은 편이다. 한국의 연세대, 고려대와 비견되기도 하는 게이오, 와세다, 죠치대학이 꽤 이름이 알려졌고 모두 도쿄에 있는 명문 대학이다. 교토, 오사카 지역에도 이름을 들으면 알법한 사립대학들이 있다. 도시샤, 리츠메이칸, 칸사이대학, 칸세이가쿠인대학 등 땅도 크고 인구도 많아서 그런지 좋은 대학이 많다. (4개 대학을 묶어 앞글자를 따서 ‘칸칸도리츠’라고 부르며 간사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사립대학이 된다)

     

그중에서 교토에 위치한 류코쿠 대학(龍谷大学)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름 입결에서는 ‘칸칸도리츠’ 바로 다음이다. 이렇게 나열하는 걸 당연시하다니 일본도 대학 서열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그래도 류코쿠 대학은 다른 대학과 비교했을 때 강점이 확실한 곳이다. 일단 일본불교의 한 종단이 정토진종에서 설립한 대학이라 종교적 색채가 짙다. 그래서 불교학 연구에 강하고, 대한불교조계종의 동국대학교와도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일본의 동국대 포지션이라 볼 수 있다.

     

류코쿠 대학은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외의 포인트가 있다. 류코쿠 대학의 도서관에서는 현전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옮겨 현재까지 전해진다고 한다.

      

대학박물관의 규모와 전시의 퀄리티도 수준이 높은 편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된 세련된 건물이 이 대학의 박물관이다. 외관은 한여름 시원하게 가리개로 쓰는 발이 내려진 듯한 모습이다. 지하엔 입장권을 판매하는 인포메이션 데스크, 1층에는 카페와 강의실, 2층과 3층은 전시실이다. 3층에는 무려 뮤지엄 시어터도 있다!

      

왜 이렇게 류코쿠 대학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지 말하자면, 가장 친한 동갑내기 일본인 친구가 류코쿠 대학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이 간다.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지만, 십 대 시절 어릴 때 만나서 가족들끼리도 교류하는 사이가 된 절친한 사이다. 그렇게 애정 어린 마음을 갖고 방문한 류코쿠 대학 박물관과 니시혼간지. 두 군데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세트로 방문하게 된다.     


교토역에 도착하면 교토타워 너머로 보이는 큰 사찰 ‘히가시혼간지’와 서쪽으로 ‘니시혼간지’가 눈에 띌 것이다. 왜 혼간지는 동쪽(東;히가시)과 서쪽(西;니시)으로 나뉘어 있는 걸까? 두 사찰 모두 정토진종의 본찰이지만 종파가 다르다.      


니시혼간지 입구에서 어영당(고에이도, 신란을 모신 조사당)과 아미타당으로 이어지는 환종복도가 보인다.


일본의 정토진종은 헤이안 시대를 살았던 승려 신란(親鸞)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살면서 사찰을 건립한 적도 없고 새로운 종파를 만들 생각도 없었지만, 그의 스승인 정토종의 호넨(法然)과 생각이 조금 달랐다.      

호넨과 신란이 활동하던 시기는 겐페이 전쟁 등으로 혼란한 12세기 말 헤이안 시대였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아미타불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려운 교학을 배우고 많은 재물을 보시해야 했다. 그때 호넨은 염불을 하는 것만이 아미타불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 신앙을 설파했다.  

    

여기에 신란은 한술 더 떠서 단 한 번의 염불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악인정기설(惡人正機設)’을 발전시켰다. 그는 염불을 읊조릴 시간도 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악인)이야말로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가난한 사람이 악인인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 수렵, 어로 등으로 살아 있는 걸 죽이는 죄를 저지르기 때문이었다.     


신넨을 따르는 신자 집단들이 커지면서 나중에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큰 교단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신란의 가르침은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중세시대 일본 농민들의 폭동인 ‘잇코잇키(一向一揆)’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1602년 에도막부는 정토진종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동서로 나누었다. 그래서 호리카와 쪽의 니시혼간지는 정토진종 혼간지파의 본산, 가라스마 쪽의 히가시혼간지는 진종 오타니파의 본산이 되었다.      


7월의 교토는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니시혼간지에서 어영당(신넨을 모신 조사당)과 아미타당을 차례로 돌아본 후, 이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역시 이럴 땐 박물관만 한 대피처가 없다. 우산을 펼칠 새도 없이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더니 습한 공기는 싹 사라지고 넓고 쾌적하기만 하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박물관에는 다섯 명 정도의 젊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자세로 불상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전시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이런 곳의 사진으로만 설명을 대신한다. 건물입구(왼쪽), 인포메이션 데스크(중앙), 전시실 입구(오른쪽)의 모습이다.


류코쿠 뮤지엄은 대학 박물관의 한계를 넘어 불교종합박물관을 표방하는 박물관답게 불교가 어떻게 일본으로 전래되었는지 소개하고, 주요 시대별, 지역별 불상을 비교하는 상설전시를 만날 수 있다. 작지만 알찬 전시장이다. 경전을 산스크리트어, 태국어, 티벳어, 일본어 등으로 읽어주는 오디오가 흥미로웠는데, 묵언을 하는 듯 고요한 전시실의 정적을 깨는 소리로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다.     


이 박물관의 백미는 단연 전시실 2층의 ‘베제클리크 석굴 복원 전시’가 아닐까 한다. 베제클리크 석굴은 6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만든 불교와 마니교 석굴이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석굴 중 하나로 투르판 지역 화염산 맞은편에 있다. 위구르어로 베제클리크는 아름다운 장식이 있는 곳(where the paintings are)이라는 의미라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그 이름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베제클리크 석굴 사원이 폐허가 된 까닭에는 먼저 무슬림들이 불상을 부수고 벽화 속 눈을 다 파는 등 훼손 행위를 하고, 그다음에는 20세기 초반 다양한 국가에서 보낸 탐사대들이 탐사라는 미명 아래 무자비한 방식으로 벽화를 뜯어갔기 때문이다. 독일인 폰 르코크는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던 제15굴을 통째로 챙겼다. 벽에 그려진 벽화를 격자로 잘라서 연장으로 벽화 뒷부분을 떼어낸 것이다. 그리고 전부 챙겨서 베를린으로 가져갔다.     


'베제클리크 석굴 복원 전시'의 일부 모습이다. 실크로드 석굴답게 다양한 민족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렇게 파괴된 제15굴의 서원화(誓願畵)를 류코쿠 대학 연구진이 디지털로 복원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결과물을 전시한 게 바로 ‘베제클리크 석굴 복원 전시’다. 전시실은 3.5m 높이와 15m 길이의 비좁은 복도의 형태다. 제15굴의 복도를 실제 사이즈로 구현해 놓은 것이다. 이 전시는 류코쿠 대학의 약 1년 반에 걸친 연구의 성과라 더욱 의미 있다. 2001년에 설립된 디지털 아카이브 연구 센터 요시히로 오카다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제15굴의 종교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NHK 방송국이 실크로드 관련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이 과정을 함께했다.     


3층 전시실의 뮤지엄 시어터에서 상영하는 12분짜리 짧은 영상 ‘복원된 환상의 대회랑(よみがえる幻の大会廊)’에는 연구진이 어떻게 복원 작업을 했는지 소개된다. 베제클리크 벽화는 부분부분들이 뜯겨져 나간 이후 각자의 사정을 안고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연구진이 조각조각을 맞추기 위해 여러 박물관을 찾아갔다. 인도의 뉴델리국립박물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독일의 베를린국립아시아미술관, 그리고 러시아의 에르미타주미술관 등등…. 국립중앙박물관이 화면에 나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상영을 시작하며 스크린이 내려오는 뮤지엄시어터(왼쪽)과 상영목록과 시간표(오른쪽)


실크로드 유물이 중박에 있는 것은 오타니 컬렉션이 오타니에서 구하라광업으로, 구하라는 데라우치 총독에게로,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 수정전 전시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광복을 맞아 일본은 휴대 가능한 유물을 위주로 가져가고, 벽화와 같이 크기가 큰 유물은 남기고 돌아갔다. 그래서 뜬금없이 한국의 박물관이 중앙아시아의 중요한 유물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다가 귀를 의심하는 순간이 생겼다. 처음에 베제클리크 석굴 벽화가 어떻게 일본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오타니 고즈이는 유적지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여 투르판 베제클리크 석굴 벽화를 일본으로 옮겨왔다.”     


뭘 두려워했다고요?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석굴에 있던 벽화를 뜯어온 걸 문화재 보호로 슬쩍 포장하다니. 베제클리크 석굴을 뜯어간 건 폰 르코크뿐만이 아니었다. 니시혼간지의 젊은 문주였던 오타니 고즈이의 탐사대는 폰 르코크가 쓸어가고 남은 벽화들을 싹싹 모아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오타니 고즈이는 이전 글에서도 잠깐 다뤘지만, 오타니 콜렉션의 그 오타니다. 정토진종 혼간지파의 제22대 문주로, 니시혼간지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지금도 일본에서 정토진종은 큰 종파인데, 당시에는 신도 수가 천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돈도 많았겠는가. (오타니 고즈이의 아내는 다이쇼 천황비의 여동생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고산병과 모래폭풍 등과 사투를 벌이며 탐사를 이어갔을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일부 구도의 자세로 탐험대에 임했을 거라 짐작된다. 하지만 아무리 순수하게 봐주려 해도 바위에 새긴 벽화를 뜯는 것은 석굴사원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가 되는데, 그저 소장하고 싶은 욕구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말 석굴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었던 건 둔황 석굴에서 몇 년을 지내며 모사했던 장대천과 같은 화가가 아닐까.     


류코쿠 대학의 연구진에 의해 복원된 아름다운 베제클리크 서원화를 바라보면 그 모든 번뇌도 날아가는 듯하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연구진은 사라져버린 베제클리크 석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혹시라도 오타니 콜렉션을 계승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문화재가 파괴될까봐 걱정해서 가져왔다’는 식의 일본의 어물쩡 넘어가는 교묘한 화법에 어린 학생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넘어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류코쿠 뮤지엄을 나오는 길에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일본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전시는 없는 걸까? 인터넷에 찾아보니 ‘리츠메이칸 국제평화박물관(立命館大学国際平和ミュージアム)’이란 장소가 나왔다. 교토에 있는 또 다른 대학박물관이다. 이곳은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행위를 ‘침략’이라고 확실하게 명시하고 침략전쟁, 강탈,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에 접근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지금 2021년부터 임시휴업 중이고 올해 9월 말까지 리뉴얼 예정이라 이번 기회에는 방문하지 못했다. 과연 리츠메이칸 대학 박물관의 전시는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될지 기대가 된다.     



[일본 교토의 류코쿠 뮤지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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