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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은 아니지만 하와이에선 박물관에 갈 시간이 없다

하와이 오아후섬 비숍박물관(1)

그동안 하와이와는 통 인연이 없었다. 주변에 하와이를 다녀온 사람은 많았다. 너무 익숙하게 들어왔던 여행지라 ‘나도 언젠가는 가겠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기회는 스스로 만들지 않고서 우연히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하와이와 비슷한 곳은 다녀온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학교에서 해외답사로 ‘괌(Guam)’을 다녀왔다. 답사지가 ‘괌’이라고 발표되었을 때 모두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답사지에서 놀다 왔다는 소리가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려던 게 목적이었던지, 답사일정은 지옥훈련 비슷하게 흘러갔다. 바닷물에 발가락 한 번 담가보지 못한 채, 인터뷰 일정과 리포트 작성으로 스케줄이 꽉 차버렸다.

      

다녀온 후, 뉴욕에 사는 친척을 오랜만에 만나 너스레를 떨었다. 늘 휴가 때면 하와이를 찾게 된다고, 꼭 가보길 추천했던 미국 시민권자인 삼촌이었다.     


“삼촌, 저 최근에 미국에 다녀왔어요.”


“오, 그래? 어디?”


“괌이요. 미국령이잖아요.”


“에이….”     


삼촌의 어이없다는 짧은 탄식이 터져 나오며 함께 웃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괌은 미국인들조차 잘 모르는 작은 섬이다. 그리고 하와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사이비(似而非) 하와이’ 같은 느낌이다. 심지어 괌에서 파는 기념품에도 ‘Hawaii’라고 써진 상품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비슷한 태평양 문화권에 속해도 괌과 다르게 '하와이'는 분명히 미국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다. 괌도 한없이 푸르렀는데, 지상의 천국이라는 하와이는 어떤 곳일까. 괌에서 더욱 궁금해지는 하와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드디어, 마침내, 염원하던 하와이를 가게 되었다. 작년엔 이래저래 바빠서 여름휴가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늦게 떠나는 여름휴가라고 생각하면서 하와이행 왕복 티켓을 결제했다. 비행기 값은 약 120만 원. 캐리어에는 여름용 옷가지들과 오리발을 챙겨 넣었다. B 매거진에 하와이 편이 있길래 잡지도 함께 샀다. 일정은 8박 10일이라 욕심내지 않고 두 군데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흘은 빅아일랜드에서, 나머지는 오아후섬 와이키키에서 지내기로 했다.

      

나는 어떤 여행지를 가든 박물관을 먼저 가보는 편이다. 습관적으로 하와이에서 가볼 만한 여러 박물관을 방문 리스트에 나열해 두었다. 평소 관심사대로 호놀룰루시립미술관, 진주만기념관, 태평양쓰나미박물관 등이었다. 그 외에도 시선을 끄는 작은 박물관이 있으면 즉흥적으로 가기로 했다. 하와이 화산국립공원도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였다. 미국 국립공원 안내소에서 판매하는 ‘국립공원 스탬프북(National Park Passport Stamp Book)’ 페이지를 하나씩 채워나가는 게 취미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습관적으로 공부를 하는 강박과 수집욕이 있는 것 같다. 사람에게든, 경험에서든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 때문에 가야 할 곳이 많아질수록 한정된 시간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그렇게 내 머릿속은 하와이에서 들러야 할 장소들로 꽉 차버렸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하와이에서는 도저히 박물관에 갈 시간이 없다. 그럴 마음이 쉽게 내키지 않는다. 리조트에서 컨티넨탈 조식을 먹고 해변에 나가 산책을 하고 점심으로 기름에 튀긴 쉬림프를 먹고 오후에 스노클링을 했더니 하루가 끝나버린다. 시간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이미 오후 다섯 시…, 박물관은 모두 문을 닫는 시각이다. 오늘 이렇게 놀기만 해도 괜찮은 건지, 내일은 꼭 새로운 장소에 가서 환기를 시켜야겠다는 다짐과 불안함이 밀려왔다. 

 

하와이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데 인적까지 드문 해변이 많다. 사진 속은 우연히 들렀던 카일루아 해변이다.

   

그렇게 렌터카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렇게나 튼 라디오에서 제이크의 ‘골든아워(golden hour)’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노래가 멈추지 않는다면 해안도로가 끝없이 이어질 거라는 상상을 펼친다. 그리고 차를 잠시 멈춰 길거리에서 파는 쉐이브아이스의 달콤함에 근심을 날려버린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웬 박물관인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느덧 깜깜한 밤이 되어 호놀룰루 시내에서 발에 차일 정도로 흔히 보이는 ABC마트에 들어갔다. 군것질거리와 하와이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정성스럽게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앳되어 보이는 한국인 여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계산대 앞에서 기다랗게 뽑힌 영수증을 보며 감탄을 터뜨리고,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기도 한다. 계산을 마친 다음엔 마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이 지긋한 여성에게 ‘교수님!’이라고 부르며 뛰어나간다. 곧 그들은 모두 한 허름한 회색 빌딩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괌으로 떠났던 답사의 추억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답사는 (주로 인문, 사회 계열 대학) 대학 시절 학과의 중요한 행사로, 학술적 의미가 있는 장소로 떠나 지식을 쌓는 활동이다. 그렇지만 집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여행’의 일종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순간 모든 여행의 조각들을 답사로 채우고 있었다. 쫓기듯이 자료를 수집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언제나 사로잡혀 있다. 괌에서의 추억의 그림자가 그 이후에도 나의 여행에 계속 드리워져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괌에서 답사활동을 통해 수많은 박물관과 유적지 등을 방문했지만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들과 땀 흘리며 걷던 외진 골목, 예상치 못한 뙤약볕에 급하게 선크림을 사서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던 모습, 그러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던 장면의 일부들이다. 그리고 파란 하늘까지. 11월에 떠난 태평양의 작은 섬은 아주 밝고, 파랗고, 눈이 부셨다. 


마트에서 만난 여대생들은 하와이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 나중에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그들에게 이번 하와이 답사가 충분히 '여행'이었길 바랐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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