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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괜찮아, 영국은 안돼

아이슬란드의 야외 박물관(4)

아이슬란드는 약 7천만 년 전에 형성되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섬이지만,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길지 않다. 가장 처음 정착한 인물로 잉골푸르 아르나르손(Ingólfur Arnarsson)이 기록되고 있는데, 그는 874년 가족과 함께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정착 이전에도 많은 북유럽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가긴 했다.

      

섬을 처음 발견한 바이킹족인 나도두르(Naddoður)는 아이슬란드 동쪽 해안가에 도착했다가 사람이 사는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고, 갑자기 눈이 내려 정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 섬을 눈의 나라, ‘스노우랜드(snowland)’라고 불렀다. 또, ‘까마귀 플로키(Hrafna-Flóki)’라는 별명을 가진 노르웨이인은 서쪽 해안에 도착해 따뜻한 여름철을 보냈지만 겨울의 혹독함과 피요르드의 얼음을 보고 ‘아이슬란드(Ísland)’라는 이름을 붙이고 떠났다고 한다. 그가 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는 세 마리의 까마귀를 따라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빨간 망토를 두른 중앙의 인물이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다. 길쭉한 나무기둥이 그를 아이슬란드로 이끌었다.

     

북유럽의 바이킹들도 혀를 내두르고 섬을 빠져나갔던 것을 보면 준비되지 않은 아이슬란드의 겨울은 견디기 어려웠던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 정착하기로 결심한 건 고향 노르웨이에서 살 수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두 개의 긴 기둥을 배 밖으로 던져 기둥이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정착하겠다고 맹세했다. 기둥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찾아보니 지금의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의 수도)'였다. 그리고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야말로 기둥에게 운명을 맡긴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최초 정착민의 이야기는 제주도 삼성혈(三姓穴)과 비슷하다. 삼성혈은 제주의 시조가 되는 세 개의 성씨를 가진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이 솟아났다고 전해지는 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이 삼신인은 각자 화살을 쏘아 맞춘 돌이 있는 곳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삼사석(三射石)이다.

     

이렇듯 인간은 우연적 현상에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한다. 바다에 떠나보낸 기둥이 파도에 휩쓸라다가 어느 해안가에 도착한 것과 화살이 바람을 타고 어떤 돌에 맞은 것은 사실 그들과 별로 상관없는 자연에 의한 현상이다.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책임하거나 비합리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중요한 결정을 왜 자연에 맡기는가? 좀 더 비약하자면, 마치 학창 시절에 동전 뒤집기나 연필 굴리기를 하면서 운을 시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 던진 기둥이 닿은 곳이 지금 아이슬란드의 인구 2/3가 몰려 사는 도시 레이캬비크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 운은 정말 하늘에 닿은 건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인류학자 에반스-프리차드(Evans-Pritchard)는 중앙아프리카의 아잔데 부족을 연구하면서 자연현상과 인간에게 벌어지는 일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원시 신앙의 ‘마력(witchcraft)’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오랫동안 마법이 존재했다. ‘불의 시대(Brennuöld)’라고 일컫는 17세기 이전까지 누군가 끔찍한 사고를 겪거나 병에 걸리면 자신의 불행을 저주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의자의 집에서 까마귀 깃털, 어떤 주술이 새겨진 나무조각 등이 나오면 마법을 부린 것으로 되어 화형 시켰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의 정착 이후 지속된 짧은 역사 중에 무려 500년이나 덴마크에 식민 지배를 당했다. 스웨덴의 항구도시 칼마르에서 체결된 ‘칼마르 동맹(Kalmarunionen)’에 의해 1397년 덴마크의 식민지가 되고 난 후, 1874년이 되어서야 아이슬란드는 자치권을 획득했다. 그 기간 동안에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의 무역을 독점하고 루터교로 전환시키는 등 많은 자유를 박탈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1944년이 되어서야 국민투표를 통해 온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아우르바이르 잔디집을 둘러본 후, 이번엔 가이드를 따라 염장한 생선을 말리고 있어 비린내가 나는 어부의 집에 들어갔다. 환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은 온통 천장에 덴마크 국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축제 때 사용하는 삼각깃발처럼 수십 개의 덴마크 국기가 반짝반짝 빛났다. 가이드의 설명이 있기 전까지는 왜 이런 분위기가 펼쳐진 것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덴마크의 왕이 아이슬란드에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많은 깃발을 꾸며서 환영했어요. 이 집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덴마크의 왕이 우연히 이 집에 들어와서 인사를 했는데 집주인은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러자 왕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까요? 얼굴이 그려진 동전을 슬며시 보여줬다고 해요. 집주인은 아주 깜짝 놀랐죠.”


1907년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7세가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당시 사진 자료다.

     

가이드 투어를 동행하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보니 나 혼자만 느끼는 위화감이었다. 아이슬란드가 오랫동안 덴마크의 지배를 받아 반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두 국가는 돈독하고 협력적인 관계라고 한다. 식민지 시절의 쓰라린 역사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가끔 식민지가 통치국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의아할 때가 많지만 그만큼 각 나라의 역사적 상황은 워낙 다양하다.

      

오히려 아이슬란드가 싫어하는 나라가 있다면 영국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업이 어업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내세울 만한 별다른 국가산업 없이 고기잡이에 열중해서 1970년대 이전까지는 ‘못 사는 나라’로 꼽히던 아이슬란드였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 대구와 청어 어획량이 갑자기 줄자 배타적 어업전관수역을 확장하면서 영국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1958년, 1972년, 1976년 세 차례에 걸쳐 소중한 대구를 확보하기 위해 영국과 전쟁을 치렀다. 그래서 이 전쟁은 ‘대구 전쟁(cod wars)’이라고 불린다.

      

아이슬란드는 해안경비정과 트롤어선의 그물을 끊는 와이어 커터를 사용해 영국 배의 조업을 방해했다. 이와 관련된 유물은 레이캬비크 도심 바닷가에 위치한 ‘레이캬비크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여기엔 해안경비정 오딘호(Óðinn)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나오는 길에 추위도 피하고 끼니도 해결할 겸 샌드위치 가게에 들렀다. 이곳에서 나는 일부러 현금으로 결제했다. 아이슬란드는 카드 사용률이 워낙 높아서 현금을 쓸 일이 거의 없다. 아니, 사실 아예 없다. ‘현금 결제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하는 곳이 많다. 하지만 나는 카드가 부러지거나 은행시스템의 문제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영국 히스로 공항에서 미리 5천 크로너를 환전해 갔다. 다행히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현금을 받아줘서 5천 크로너를 깨고 1천 크로너 몇 장과 동전을 거슬러 받았다. 그렇게 아이슬란드의 동전을 처음 만나고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들에겐 물고기가 정말로 중요하다.


아이슬란드 동전

     

참고 : 아이슬란드는 1874년 자치를 인정받은 후 1885년부터 자제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물고기는 동전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예전에는 홍어, 오징어, 새우 등이 주인공이었고, 현재도 50 크로네 동전에는 꽃게(shore crab)가, 100 크로네 동전에는 럼프피시(lump fish)가 그려져 있다.      


[아이슬란드의 야외 박물관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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