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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살지 않는 잔디집의 온기

아이슬란드의 야외 박물관(3)

아우르바이르 야외 박물관의 오픈 시각인 1시에 맞춰 도착했다. 이 박물관은 여름인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을 제외하고, 오후 1시에 열고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아마도 해가 짧아서 그럴 것인데, 내가 여행했던 2월의 아이슬란드는 아침 9시가 되어도 바깥이 어두컴컴했다. 1시에 딱 맞춰 간 이유는 그 시간에 하루 한 번,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보통 상설로 운영되는 도슨트는 소규모라 운이 좋다면 가이드와 1:1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곳은 과연 몇 명이나 모이게 될까 기대했는데, 예상외로 아홉 명이나 더 있었다. 그중 여섯 명은 아이슬란드 초등학교 남학생, 세 명은 인솔자들이었다. 순간 모두 아이슬란드인이고 어린이였기 때문에 가이드투어가 아이슬란드어로 진행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누가 보아도 바이킹의 후예처럼 보이는 큰 몸집의 가이드가 다가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1시에 시작하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거죠? 영어로 먼저 설명하고 그다음에 아이슬란드어로 할게요.”

두 가지 언어로 동시에 투어를 해준다니 은혜로울 따름이었다. 심지어 그는 영어로 설명한 후, 아이슬란드어로 이야기하다가 혹시 더 부연 설명된 부분이 생기면 다시 영어로 설명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투어 중간중간 춥지 않은지 살피고 궁금한 점을 한 가지 물어보면 열 가지로 답변을 해주는 따뜻함을 보여주었다.

      

1842년 세워진 루터교 교회 건물에서 가이드가 제단화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우르바이르 야외 박물관은 1942년 시의회에서 처음으로 레이캬비크의 옛 문화를 보존하자는 데 합의하며 도시기록보관소를 먼저 운영하다가 1957년 공식적으로 이 자리에 문을 열게 되었다. 박물관은 입구에서 보이는 것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매표소 건물을 통해 입장하면 보이는, 사각형의 광장을 둘러싼 목조건축물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오솔길을 따라 몇 분 동안 걸으면 넓은 초원이 펼쳐지며 20채 정도의 가옥이 듬성듬성 등장한다. 입구에 위치한 건물은 대부분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즈음에 지어진 훌륭한 목조 건축물이면서 노르웨이에서 수입한 조립식 건물이거나 콘크리트를 덧대어 개축한 건물이다. 반면, 울타리까지 걸어가서 만날 수 있는 집들은 뭐랄까, 호빗들이 살고 있을 것 같다.


아우르바이르 집 맞은편에 있는 대장장이의 집이다. '잔디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잔디가 지붕, 벽면까지 뒤덮고 있으며 창문과 문은 앙증맞은 크기다.

     

톨킨이 창조한 세계관에서 가장 독특한 종족인 호빗은 ‘땅속, 작은 굴에 사는 사람들’이다. 영화에서 연출한 것과도 아주 흡사한 이 옛날 집은 자작나무로 만들었지만 지붕은 흙을 덮어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일명 ‘잔디집(turf house)’이라고 불린다.


“다른 집들은 모두 다른 곳에 있던 걸 통째로 옮겨왔는데, ‘아우르바이르’ 이 집만 원래 여기 있던 자리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요.”


가이드의 설명은 이 야외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전시장이 ‘아우르바이르’라고 불리는 잔디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집이 있기 때문에 박물관이 여기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천장은 왜 이렇게 낮은 거예요?”


자꾸 머리가 천장에 닿아 불편한지 한 명이 질문했다.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라고 등 떠밀던 인솔자였는데, 그 점은 한국의 학부모들과 비슷해 재미있었다.


“100년 전 사람들은 우리보다 머리 하나씩 키가 더 작았어요. 그들에겐 딱 맞는 공간이었죠.”


가이드는 키가 굉장히 컸는데, 잔디집 안에 들어오면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내게도 머리를 조심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아, 괜찮을지도’라고 덧붙였다. 호빗은 내 키 정도만 했던 것 같다.


건물을 어떻게 옮겨왔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 사진이었다.

     

겉으로 봤을 땐 영화 속 무대처럼 낭만적으로 다가오며 한국인인 내게도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켰지만, 이 집에 머문 시간 동안은 불편하고 추웠다. 기존의 잔디집에 목조건물을 옆에 붙여 혼합된 형태의 집인데, 1948년까지 실제로 거주하다가 이사 가면서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니 벌써 75년 동안 빈집인 것이다. 내부에 들어가면 어둡고, 좁고, 낮아서 불편하고, 집 내부에 외양간도 있어 예전에는 냄새도 많이 났을 것 같다. 아궁이와 가마솥이 있는 구식 부엌에는 환기를 위한 장치도 보이지 않았는데, 천장에 고기를 매달아 보관했다고 한다. 훈연 효과를 노렸던 것일까?

      

유기물로 만들어 보수하기도 어려웠던 잔디집은 오랫동안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주거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섬에는 쓸만한 건축자재를 구하기 어려워서 수입을 해야 하는데, 아이슬란드를 500년간 지배한 덴마크 왕국은 수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산업화된 주거공간이 생겼고, 잔디집은 버려졌다. 특히 1930년대에는 레이캬비크 시내에 콘크리트로 지은 집이 굉장히 많이 생겼는데, 할그림스키르캬(Hallgrímskirkja) 교회로 유명한 구드연 사무엘손(Gudjön Samúelsson) 또는 아이너 얼렌손(Einar Erlendsson)과 같은 건축가가 활동했던 시기도 그때다.      


잔디집 밖을 나오니 광범위하게 땅이 파헤쳐진 구역이 있었다. 가이드는 이곳에 매년 고고학과 학생들이 방문해 발굴조사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이들, 발굴조사를 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인솔자와 가이드조차 이런 집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미 버려진 지 오래된 잔디집은 젊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이 척박하고 황량한 땅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선조의 삶을 기억하려는 움직임이거나, 아니면 이미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공허한 노스탤지어일 수도 있다.     


‘야외 박물관’은 실내가 아니라 야외에 있다는 장소적 구분의 의미도 있지만, 사라져 가는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민속박물관을 뜻한다. 그 첫 시작은 스웨덴의 ‘스칸센(Skansen)’ 박물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언어학자였던 아르투르 하젤리우스(Artur Hazelius)는 산업화로 인해 소멸되어 가는 스칸디나비아의 농촌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17~19세기 스웨덴의 마을풍경을 야외 박물관의 형태로 보존하기로 했다. 북유럽에서는 1891년 스칸센 이후로 1897년 덴마크 코펜하겐, 노르웨이 오슬로와 릴레함메르, 1908년 핀란드 폴리스에 야외 박물관이 잇따라 설립되고 그만큼 성행했다. 이곳 아이슬란드의 야외 박물관도 같은 맥락에서 설립된 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주인이 떠나버린 집은 손님들로 가득 찬다고 해서 온기가 돌지 않는다. 그래서 야외 박물관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차갑다. 그러나 폐허로 남았을 집을 이전하고, 수리하고, 가꾸는 수고로움은 이젠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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