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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못하는 사람의 술에 대한 단상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 라 시테 뒤 방

나는 술이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을 들이켰을 땐 잘 몰랐는데, 난 술이 몸에 안 받는다. 그때는 젊은 몸이 단련하듯이 매일 술을 먹으니 내가 잘 먹는 줄 알았던 것 같다.

     

25살 이후로는 술을 먹지 않는다. 큰 트라우마가 된 사건을 겪고 나서다. 민속학을 공부한 나는 드라마 <악귀>에 나온 모습처럼 자주 시골에 내려가 마을회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약주를 했다. 라뽀 형성을 하겠다고 막걸리를 주시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래도 몸은 괜찮았다. 약간 알딸딸한 정도? 그런데 서울로 올라오는 KTX에서 사달이 났다. 갑자기 욱하고 올라오는 걸 바닥에 쏟아냈다. 모두의 경멸 어린 시선을 느끼면서 내가 쏟은 토사물을 순식간에 온몸으로 닦았다. 그 이후론 술을 하지 않는다.


한 모금만 마셔도 취하니 한 선배가 부럽다고 했다. 술을 먹지 않으니 알코올에 더욱 약해졌다. 선배와 간단하게 치킨에 맥주 한잔 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한 모금에 얼굴이 벌게지며 취기가 확 올라왔다. 한 잔이 아니라 한 모금이었다. 그랬더니 선배가 하는 말은 ‘부럽다.’ 술은 취하기 위해서 먹는 건데, 술값 아껴서 좋겠다는 뜻이라 해석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좋다. 술에 취해서 해롱거리는 사람이 좋은 게 아니다. 다른 게 아니라 선물하기가 좋다. 술은 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하고 프리미엄 딱지가 붙은 선물용도 많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선물을 고르기도 쉽다.      


요즘엔 술 못하는 사람을 알코올쓰레기라고 부른다. 알코올쓰레기로 살면서 스스로 쓰레기라 느끼거나 불편한 점이 없으니 괜찮지만, 그래도 ‘내가 술을 좀 마실 줄 알았으면’ 할 때가 있다. 가장 곤란할 때가 언제냐면 레스토랑의 디너 타임이다.


유전적인 요인인지 우리 집 다섯 식구는 모두 알코올이 몸에 안 받는다. 종교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그저 술을 조금만 마셔도 몸이 못 버티고 맛도 모른다. 동생들은 모두 스무 살 입학 직후에 친구 등에 업혀서 집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동생들도 아예 안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가족끼리 레스토랑에 가는 건 곤혹스럽다. 술을 주문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식사만 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레스토랑에 민폐라는 생각이 든다. 룸까지 잡았으니 매상을 올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도 마실 수 없는, 마시지 않는, 마시고 싶지도 않은 비싼 샴페인을 시킨다. 분위기를 내며 짠! 정도 하고, 사진 몇 장 정도 찍고, 한 모금씩 억지로 입에 대보고 끝난다.      



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내가 프랑스에서 꼭 가고 싶었던 보르도 와인 박물관. 이름하여 라 시테 뒤 방(La Cité du vin), 영어로 하면 시티 오브 와인(The City of Wine), 한국어로 하면 와인의 전당, 와인마을 같은 느낌이다.


라 시테 뒤 방의 외관. 와인 디캔터를 닮은 건축으로 유명하다.


여기를 가고 싶었던 건 와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 박물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새로운 박물관 건립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국내, 국외 사례를 참고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하늘길이 막히고 국내에서도 많은 박물관이 운영을 중단했다. 그저 온라인으로 자료를 조사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서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전시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정보를 많이 업로드한 박물관에 감사하게 되었다. 온라인 홈페이지를 잘 구비한 박물관에 막연한 환상도 생겼다.

     

온라인상에서 시테 뒤 방은 감각적이고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빠르게 화면이 전환되면서 언뜻 비추는 영상 속에서 이곳의 전시가 얼마나 디지털을 잘 활용하고 몰입형 전시를 위주로 꾸며놓았는지 알 수 있다. 상설전시를 18개 섹션으로 나누고 포도밭, 포도품종, 양조법, 시음법, 와인의 역사, 보르도의 와인 등 풍성한 내용을 다룬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많이 하듯 상설전시 도면을 올려놓은 게 아니라, 커서를 갖다 대면 숏츠가 나오듯이 전시가 어떤 내용일지 관람객이 미리 알게 한다. (laciteduvin.com 참고)  



라 시테 뒤 방 온라인 페이지의 일부 상설전시에 관한 내용이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홈페이지를 가진 박물관은 어떤 느낌일까.

온라인에 엿본 그대로의 감동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질까. 아니면 이게 전부일까.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멋진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소중한 휴가를 시테 뒤 뱅에 할애하기로 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시테 뒤 방은 보르도의 북쪽 바꺌렁(Bacalan) 지역에 있다. 이곳은 전통적인 도심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가론강변을 따라 옛 창고건물을 개조해 만든 멋스러운 레스토랑과 바가 늘어서 있다. 여름휴가를 온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매력적이 장소다. 시테 뒤 뱅에 들르면서 하루 정도 보내기에 적당하다. 보르도 생장역에서 바꺌렁까지는 택시 타고 약 20분, 비용은 35유로 정도 거리다. 난 바꺌렁 지역에 있는 호텔에서 2박을 했다.     



푸드코트 같이 작은 식당이 모여있는 Les Halles Bacalan(왼쪽), 호텔에서 바라본 강가(가운데), 바꺌렁 지역의 주택가(오른쪽)



보르도의 와인박물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박물관이다. 하루종일 머무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박물관.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배우고, 때로는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 두 발로 포도를 으깨는 게임도 하고, MBTI 검사 비슷하게 ‘내가 와인으로 태어난다면 무슨 와인일까’ 체크도 하고, 쇼핑도 한다. 레스토랑과 바는 두 군데로 나뉘어 간단하고 헤비한 식사 모두 가능하다. 쇼핑은 뮤지엄 숍도 있고 와인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와인숍이 별도로 있다. 전시는 오감을 모두 활용하게 만든다. 특히 후각전시는 미간을 찌푸릴 만큼 진하게 냄새를 풍기는 전시를 오랜만에 보았다. 그만큼 전시물 관리가 꾸준히 잘 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라 시테 뒤 방의 상설전시 중 일부다.



박물관을 즐기면서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단 한 번, 약간의 불편함은 있긴 했다. 박물관 내부의 1층 식당에서 식사할 때 ‘그래도 와인박물관인데 와인 한 잔은 시켜야지’ 생각에 주문한 술 때문이다. 친절한 서버는 술과 식사에 대해서 외국인인 나에게 쭉 설명을 해주었다. 프랑스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고, 외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와인과 함께 먹으면 좋다, 등등.



25유로 짜리 식사 (크림 뒤바리+두록 돼지고기 요리+레드와인 l'auratae nero d'avola 2020)



맛도 잘 모르겠고 한 모금하고서 얼굴을 찌푸리는데, 서버가 다시 찾아왔다. ‘와인은 어때?’ 나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최고야!’ 와인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박물관에 반한 건 진짜였으니. 시테 뒤 방은 백문이 불여일견, 술못하는 사람도 가보길 권하고 싶다.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 '라 시테 뒤 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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