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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불편하려고 가는 박물관

중국 길림성 연길시의 연변박물관

그 박물관의 1층에는 석류가 있다.


“동북공정의 결과물을 보러 가는 거야?”     


조선족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연변박물관에 가겠다고 하니 재미없을 텐데, 걱정해 주면서 대신 새로 생긴 ‘연길공룡왕국’을 추천했다.


연길공항에서도 가까운 공룡왕국은 공룡을 테마로 한 놀이공원인데, 규모도 꽤 크고 어트랙션도 많은 모양이다. 2016년 길림성 연변에서 9천만 년 전 백악기 시대 공룡 화석이 발굴되면서 그것을 기념하고 문화관광요소로 활용하고자 테마파크로 만든 것이다.   

  

흠, 고민이 되었다.

연길 기차역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까지는 약 3시간이 남았는데, 연변박물관과 연길공룡왕국을 모두 가볼 수는 없다. 둘 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결국 원래 계획대로 연변박물관을 선택했다.

연변박물관은 진달래공원 옆에 있고, 연길기차역(서역)에 가깝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조선족 친구가 이야기한 ‘동북공정’이라는 말이 자극적이기도 했다.

연변박물관이 어떤 전시를 보여주는 곳일지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해괴한 단어다.     


연변박물관은 1960년에 건립되어 지금까지 역사가 깊다. 현재의 건물은 2012년에 준공한 것으로, 2015년에 시진핑 총서기가 방문한 이후 최근에는 SNS에서 인기를 타게 되어 엄청난 관람객 수를 자랑한다. 리플릿에 의하면, 연 관람객 수는 약 3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건물은 웅장하고 크지만, 입구는 건물의 뒤편에 있어 한참 돌아갔다.

친구는 건물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했다. 보여주기식으로 지은 건물이라 기능성은 영 꽝이라고. 중국에는 이렇게 지은 건물이 많다고 했다. 나도 동감했다. 굉장한데, 뭔가 어설퍼. 자재가 문제일까? 아니면 마감이 문제일까? 건축 전공이 아니라 무어라 형언하기 어렵지만, 중국의 신축 건축물은 되다 만 느낌이 있다.     


뒤편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경악했다.


‘이건 내가 생각한 박물관의 모습이 아닌데? 이러면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이 아니잖아.’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했을 때, 분명 연변박물관은 사람도 없고 한산해 보였는데.

박물관 입구는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요즘 중국인들에게 연변여행이 유행이라는 이유였다. 입구 앞에는 단체 관광객을 쏟아내는 버스가 줄지어 들어왔고, 버스에서 내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은 어마어마한 대기 줄을 만들어냈다.      


입장은 무료지만, QR코드를 통해 사전 예약과 등록을 해서 입장해야 한다.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보안 검색 후 입구로 들어갔다.

입장만으로 진땀을 뺐다.     


연변박물관 입구(왼쪽)와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로비의 모습(오른쪽)


연변박물관의 전시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층은 70주년 중화민족공동체의식 확고화 전시

2층은 조선족의 민속 전시

3층은 연변지역 출토물 전시와 혁명투쟁사 전시     


1층부터 3층까지 무엇 하나 흥미롭지 않은 전시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불편할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1층은 특별전시로, 2022년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역사가 70주년을 맞으면서 새로 단장한 것이었다. 조선족자치구는 1952년 설치되었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주덕해란 인물이다. 1911년 연해주에서 출생하고 본명이 오기섭인 주덕해는 광복 전에는 팔로군에 있다가 하얼빈에서 조선의용군 활동을 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교육사업에 힘썼다. 조선족 중학교, 연변대학교 모두 그가 세운 학교다. 그는 조선족의 권위를 위해 지나치게 노력했다고 해서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선족의 특수성보다는 중국은 하나라는 기치가 훨씬 앞서게 되었다.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고 

중화민족 공유의 정신적 락원을 건설합시다.”     


1층 전시실 입구에는 석류 디지털아트 전시물이 있다.


이러한 슬로건과 석류의 비유는 연길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많이 본 것이었다. 기차역, 버스터미널, 공항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위한 붉은 플래카드가 곳곳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알알이 흩어졌다 하나로 다시 모이는 석류 디지털 미디어아트를 만날 수 있다. 석류 알은 각각의 56개 민족을 의미하며, 하나의 석류처럼 모두 합심하자는 걸 상징한다. 재미있는 건 석류알은 다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과연 하나의 중국을 외치면서 조선족 특유의 문화와 관습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전시실을 구석구석 뜯어보던 나는 며칠 전 참석한 조선족 친구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 조선족의 전통문화는 대체 무슨 문화일까?     


2층 전시는 예전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의 축약판이라 볼 수 있다. 한 전시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세시풍속을, 다른 전시실은 일생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후기의 풍속을 보여줘 구성도 같다.     

그중에서도 남녀가 마주 보며 혼례를 올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선족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연변에 방문한 터였다. 예전 국립민속박물관의 상설전시에서도 혼례 전시 앞에서 중국인 패키지 관광객을 이끌고 온 가이드가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조선시대 혼례 풍습과 큰상을 묘사한 연변박물관 전시 일부.


“전통문화라고 했는데, 확실한 건 한국의 전통은 아니라는 거야.”  

   

결혼식에 참석한 한국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했던 말이었다.

신랑 신부의 차량이 결혼식장에 도착하면 친인척과 하객들은 한복을 입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따라간다. 한국에서 한복은 직계 가족만 입는데, 여기서는 많이 입어 보기도 좋고 신나기도 했다. (여성만 한복을 입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옆에 있는 한족 친구에게 ‘나도 이건 처음 보는 광경이야’라고 말했다.     


신랑 신부는 바가지를 던져서 자녀의 성별을 점치기도 했다. 바가지가 뒤집히면 아들이고, 움푹 파인 곳이 나오면 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처음 들어보는 전통문화에 ‘바가지는 깨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한국인도 사실 전통문화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 뭔가 비슷하긴 한데, 다르다.     


이미 조선시대 후기,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문화는 한반도 땅에 남아 옛 전통을 기억하는 사람의 것과 달라졌다. 그들의 문화도, 이곳의 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 마련이다. 앞으로는 더 많이 달라지고,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조선족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인구의 대부분은 비(非) 조선족이며, 설령 조선족이라 하더라도 꼭 조선말을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 언어부터 과거와 단절되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런 것인지 친구의 사례로 짐작해 보았다.     


이번에 결혼한 조선족 친구는 길림성에서 10∼15년에 한 명 꼴로 배출한다는 중국의 탑 명문대 출신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합격했을 때, 신문에도 실리고 방송국 인터뷰도 했다고 한다. 전국의 천만 입시생이 경쟁해서 그중에 3천 명만이 갈 수 있는 대학이라고 하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때는 조선족 학교를 다녔지만, 명문대 진학을 위해 한족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친구는 한국에 유학 오기 전까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했다. 같은 이유 때문인지 그의 조선족 친구들도 거의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안녕하세요, 조선족입니다’ 정도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말이 유창한 대부분의 젊은이는 한국의 경험이 있어서라고 한다. 연변박물관의 기념품점에서 만난 조선족 직원은 길림성 남자들은 한국에 다녀오지 않으면 결혼을 못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훈춘 출신의 그 직원 역시 자신도 젊은 시절 한국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조선족은 이미 자기만의 문화, 한반도와 중국의 사이에 낀 문화,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한민족의 동포라는 특별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족이 만들어낸 문화는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변모할 것이다. 중국의 다른 문화와 적당히 절충도 하고, 섞여 들어가면서 원래 갖고 있던 독특한 색은 많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엔 거의 모든 조선족이 ‘조선족’이 아닐 수도 있고, 조선족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 연변박물관은 3층까지 둘러봐야 한다.     


3층은 연변지역 출토물 전시와 혁명투쟁사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복도에 불이 꺼져 캄캄해 전시실도 없는 줄 알았다.     

두 시간 넘게 전시를 관람하니 화장실이 급했다.

다행히 3층에도 화장실이 있었다.

희미한 조명을 따라 화장실 앞으로 갔지만, 바로 돌아 나오게 되었다.

칸막이 문을 모두 열고 볼일을 보는 광경을 접하니 급했던 용무가 사라져 버렸다.     


3층 연변지역 출토물 전시실은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눈에 대신 담아왔다. 눈에 띄는 전시는 단연 발해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가 재현된 공간이었다. 무덤의 벽을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위로 올라갈수록 나팔모양으로 공간을 줄이며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된 무덤이다. 정효공주의 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용두산 고분군 중 하나이니 이 지역의 중요 출토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거슬리는 부분은 ‘발해는 말갈족 수장인 대조영이 건설한 나라’이며, ‘당나라의 제후국이었다’고 적은 것이다. 발해는 연호를 따로 만들 정도로 독립적인 나라였고, 고구려의 양식을 채택했다고 알고 있던 나의 국사 시간에 기반한 지식과 거리가 멀었다. 대조영의 출신지나 고구려 유민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연변박물관에서 마련한 전시패널만 보면 발해는 고구려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혁명투쟁사 전시까지 돌아보고 북적거리던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박물관 입구에는 무슨 기차역이나 백화점 앞과 같이 택시가 줄지어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택시를 타고 ‘후어쳐짠(火车站)’에 가자고 했다. 이제 하얼빈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택시 안에서 연변박물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기차시간에 쫓겨 3층의 전시를 좀 더 천천히 관람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다만 한락연의 작품이 전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어 뇌리에 남았다.


한락연(1898∼1947년)은 용정촌에서 태어났고, 첫 번째 조선족 화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1920년대에 항일운동가였으며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이름을 고쳤고, 당 조직이 와해되자 1930년대에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무엇보다 신강에서 고창국 유적지와 키질석굴의 천불동 발굴 관련 일에 헌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화가 한락연의 일생과 그의 작품을 소개한 연변박물관의 전시 일부.


그러나 연변박물관은 미술관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의 작품은 단 한 점만 소개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수채화 <신강천지>다. 그가 신강 투루판, 키질 등지를 연구할 때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와 비슷한 시간을 살았던 멕시코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년)가 떠올랐다. 디에고 리베라 역시 멕시코 공산당의 당원이기도 했고, 유카탄 반도의 원주민의 생활상에 반해 그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는 일평생 멕시코의 정체성을 위해 헌신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는 미국에서도 사랑받았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화가이면서 동시에 열성적인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그들은 언뜻 닮았다. 그러나 한락연이라는 이름 앞에 중국 공산당원이자 조선족 화가라는 설명을 부여하는 순간, 그의 개인사가 얼마나 복잡다단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3층의 혁명투쟁사 전시는 연변 즉 예전의 간도지역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들의 정체성을 헷갈리게 표기한다. 전시 패널에서는 ‘조선인’, ‘조선인이주자’, ‘조선족’을 자주 혼용한다. 그러나 조선족은 엄연히 조선인이주자, 조선인과 다른 말이다.      


현재 박물관에서는 이런 ‘특별한’ 존재들, 경계에 서 있는 민족의 역사를 소급해서 모두 ‘조선족의 역사’로 서술한다. 일견 타당하지만, 그것이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생활고로 인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향이 있었고, 여전히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선조의 땅을 뒤로한 채였다. 중국을 강조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지운다면 이들의 문화는 반쪽짜리일 뿐이지 않을까.



[중국 연길의 연변박물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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