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 돌아왔는데 솔직히 난 병원을 잘 안 간다. 아니, 병원 가기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참을 만큼 견디다가, 아주 죽게 생겼을 때야 그때 비로소 병원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병을 키울 대로 키워서 가는 미련한 짓을 또 하고야 만다.
이게 다 미국에서 힘든 이민 생활을 견뎌내면서 길러진 슬픈 습관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병원비가 워낙 어마어마하다 보니, 웬만하면 그냥 참고 버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정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는데, 그런 극한의 인내를 실천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씁쓸한 현실이다.
물론, 주머니 사정 걱정 없는 부자들은 예외지만.
하지만, 왜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돌아와서까지도, 병원을 잘 안 가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가진 대한민국이, 과연 환자의 마음까지 치료하는 그런 의료 시스템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할 것 같다.
병원은 마지막 순간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아플 때 그저 마음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된다면, 더 이상 참고 견디는 그런 미련한 짓은 그만하지 않을까.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고 평가받고 있고, 미국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나한테는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환자로서 경험하는 느낌은 많이 다르다.
특히, 병원을 찾는 사람의 입장에서 ‘진료의 질’이란 단순히 의학적 기술만이 아니라, 의사와의 소통과 공감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 문을 여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속전속결 시스템’이 아직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적응이 안 된다.
예약을 하고 찾아가면, 환자는 그저 대기번호를 기다리는 손님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진료실 앞에서 자신의 번호가 전광판에 뜨기만을 기다리다가, 내 순서가 돼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의사는 환자의 얼굴이 아니라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시작되는 진료는 2분을 넘기지를 못한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이러이러해서 왔는데요,”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약 처방해 드릴게요."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혹시 어디가 안 좋은가요? ”
“일단 약 드시고, 심하면 다시 오세요.”
그러고는 의사 가운을 걸치신 선생님께서는, 칸막이를 제치고 옆방으로 쏜살같이 나가신다.
고작 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그 긴 시간을 기다렸다가 온 것이다.
그야말로 2분 만에 끝나는 진료, 이건 뭐 패스트푸드도 아니고, 패스트 진료라고 할 수 있겠다.
패스트푸드도 최소한 십분은 걸릴 것 같다.
칸막이가 쳐진 곳에서 1~2분 미만 간격으로 왔다 갔다 하시는 전문의께서, 환자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모니터만 들여 댜 보면서 내려주는 처방이 영 마음에 안 든다.
과연 이 처방을 믿어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물론, 한국의 의료진들이 능력이 없거나 성의가 부족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뭐든 빨리빨리 해야만 속이 풀리는 한국 시스템 자체가, 환자 중심이라기보다는, 효율성과 속도만을 중시하는 그런 구조로 운영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많은 의료 드라마를 보면서 알게 된다.
대형병원일수록 환자 한 명당 배정되는 시간이 짧다 보니, 의사들도 어쩔 수 없이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최대한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현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의료는 단순한 처방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설명하고, 의사는 그 이야기를 경청한 뒤 공감 어린 답변을 건넬 수 있어야 진짜 ‘치료’가 이루어질 텐데, 정작 제일 중요한 ‘문진’이라는 것이,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한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짧게 주어지는 진료시간 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이다 보니, 막상 병원에 가서도 정작 말해야 할 것도 잊어버리고, 물어봐야 할 중요한 것도 잊어버린 채, 그 아까운 시간을 그냥 낭비하고 오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꼭 병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미리 노트에다 일일이 메모를 해서, 아예 의사 선생님한테 그 메모장을 건네준다.
서글픈 일이다.
미국에 살 때는, 병원을 가려고 예약을 하면 최소 한 사람당 45분이라는 시간을 준다. 한인들이 운영을 하는 병원을 가도 보통 20분 이상은 주는 것 같다.
우리가 미국을 떠나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9년째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미국도 조금 변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도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이나 지인들한테 물어보면,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병원을 찾아갔을 때, 내가 손님이라는 인상을 받은 적이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극진한 환자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일단 내 순서가 되면, 미국 병원이든, 한국 병원이든, 나를 봐 주시는 의사 선생님께서 직접 차트를 들고나와서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고는 송구스러울 정도로 아주 정중하게 에스코트를 해 주시면서 진료실로 안내를 한다.
그리고 또, 분위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신다.
오늘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아침은 무엇을 드셨어요?, 손녀는 학교 잘 다니고 있느냐는 등, 아주 사소한 질문을 한다.
그렇게 환자하고의 친밀감을 도모하면서,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킨다.
그게 바로 문진인 것이다.
한때, 노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도시에서 산 적이 있었다.
시골이다 보니, 뉴욕이나 LA처럼 한국 병원이 없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미국 병원을 찾아갔는데, 가뜩이나 영어도 서투른데 그 어려운 의학 용어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혹시나 하고 들고 갔던 한영사전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찾아보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께서 활짝 웃으시면서, 내 사전을 같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단어를 같이 찾아가면서, 일일이 내 몸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신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해 있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끝까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신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이 너무도 그립고 감사한 마음이,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 돌아와서 더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언제부터 이런 “문진‘이라는 것이 사라졌는지 너무도 안타까울 따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아마 요즈음의 미국도 이런 정겨운 모습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걱정도 해본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옛날 우리나라의 정서는 이렇게까지 메마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밤늦게 탈이 난 애를 둘러업고 병원 문을 두드리면, 자다가도 나와서 마치 자기 자식이 아픈 것처럼 정성을 다해서 봐주시더라는 말을 종종 들었던 것 같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변한다 해도, 패스트푸드로 전락하는 의료 시스템만큼은 피하고 싶다.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 하나로, 그 힘든 이민 생활을 견뎌낸 적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검사 하나를 하더라도, 일일이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녀야 했다.
병원 한 곳에서 모든 검사를 끝낼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간단한 X-Ray 하나를 찍기 위해서도 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우선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고 검사 처방을 받는다.
그리고 X-ray를 찍으러 차를 타고 30분, 찍고 나면 또 다른 검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차를 몰고 40분, 다음날 또 다른 검사가 잡히면 또 차로 다시 이동.
이것이 미국 병원의 현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병을 치료하러 다니는 건지, 병을 더 키우는 건지, 헷갈리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한인들 사이에서는 농담 반, 한숨 반으로 이런 말이 돌았다.
“미국에서는 검사받으러 다니다가 결과 나오기도 전에 지레 죽겠다.”
농담 같지만, 실제로 검사 하나 받기 위해 몇 주씩 대기해야 하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해야 하는 그런 현실을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같은 날 바로 진료를 받고,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당일 검사까지 마칠 수가 있으니,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이런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마냥 부러웠고, 너무도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단 한 가지, 2분 만에 끝나는 진료만 빼고.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이라는 책으로 일약 스타가 되신, 노년 내과 전문의 정희원 교수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너무나도 감동스러웠다.
노년 내과는 다른 일반 내과하고는 다르게 “질병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는 것이 다르다고 하셨다.
“사람을 질병보다 먼저 본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갑자기 감동스럽게 변할 만큼, 그만큼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의 의료진들은 사람보다는 질병을 먼저 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희원 교수님은 한국 대형병원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환자 1명당 15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주신단다.
일반 병원들의 2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노년 내과의 ’15분‘이라는 시간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하지만 정희원 교수님께서는 이 15분이라는 시간도 사실 어르신들 진료하는 데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하시면서 최소한 30분을 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신단다.
연륜이 쌓일수록 몸도 마음도 쉽게 무너지는데, 이런 노인들의 아픔을 듣고, 이해하고, 다독이기엔 15분을 너무 짧다고 하신다.
차마 다 묻지도 못한 채 시스템상 진료를 끝내야 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며, 오히려 죄송해하는 정희원 교수님의 모습에서, 환자에 대한 따뜻한 진심이 느껴진다.
이런 의사 선생님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계 최고의 의료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의료 서비스는 더욱 따뜻해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다.
빠르고 효율적인 진료, 잘 갖춰진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은 분명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의료가 단순히 ‘빠르고 저렴하다’는 점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진료의 본질은 단순한 처방을 넘어,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데 있다. 물론 친절하고 따뜻한 병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없었던 걸까. 나는 그런 병원을 쉽게 만나지 못했다.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단순히 몸이 아파서만 가는 것이 아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까지도 함께 의지하고 싶어 찾는 곳이다.
이런 순간, 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눈 맞춤과 진심 어린 한마디가 때로는 어떤 약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
의료의 질은 기술과 속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그만큼 환자를 귀히 여기는 따뜻한 병원들로 가득해지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얼마 전 넥플릿스에서 ‘중증외상센터’라는 드라마를 봤다.
죽음의 문턱에서 실려오는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의료진,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는 정성과 간절함이 화면을 뚫고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들에게 의료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였고, 신념이었다.
그 절박함과 헌신이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짜 의료의 모습이 아닐까?
환자가 병원에 들어섰을 때, 단순히 ‘빠른 처방’이 아니라, ‘당신의 아픔을 낫게 해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시스템.
환자의 눈을 마주 보고, 증상을 듣고, 불안을 덜어주려 노력하는 의료진.
병원은 단순히 치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 희망을 찾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온다면, 더 이상 병원 가기를 망설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