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노후
살아온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품격은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다.
인생의 경험과 지혜가 쌓여 성숙해진 사람들은, 어느새 타인을 감싸안는 너그러움과 인품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한다.
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인생이 잘 풀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호선 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바로 ‘관대함’과 ‘긍정성’, 그리고 ‘마음가짐’이 그 핵심이라고 말한다.
교수님은 이러한 삶의 태도가 중년 이후의 인간관계와 삶 전반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온다고 강조하신다.
이호선 교수님은, 숭실 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이자 “오십의 기술”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중장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건네는, 대중에게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심리 전문가이다.
이런 작가님께서, 특히 나이 들수록 반드시 경계해야 할 세 가지 행동으로, “자랑질”, “지적질”, “이간질”을 꼽은 것이다.
이른바 ‘3질’이라 불리는 이 행동들은, 겉으로는 사소한 말과 행동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인간관계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독소인 것이다.
이호선 교수님은 “자랑질은 나의 우월감을 드러내 타인을 위축시키고, 이간질은 관계의 균열을 조장하며, 지적질은 상대를 비난해 자존감을 꺾는 행위“라고 단호히 말한다.
이런 말과 행동이 반복되면, 결국 그 사람은 ‘외로움’이라는 벽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면서, 좋은 관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쓸쓸한 노년을 맞이하게 된단다.
결국 인생의 품격은 나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살아왔느냐가 그 사람의 품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그 선을 지키면 관계는 더 단단해지고, 그 선을 무심코 넘는 순간, 오랜 인연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숱하게 봐왔다.
그중에서도 나이 들수록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랑질’이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의 성공담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결례다.
“내가 예전에 말이야~~”로 운을 떼는 순간, 상대는 이미 마음의 문을 쾅 닫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특히 자식 자랑만큼은 삼가야 한다.
자랑질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 같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면, 세상 어디를 가도 그 버릇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며 힘겨운 날들을 견뎌냈다.
그 시절, 유일한 쉼터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일이었다.
신앙을 떠나, 그곳은 정겨운 사람들과 지난 일주일 동안의 소식을 나누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스마트폰이 흔하지 않던 시절, 교회는 소통의 중심이었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일자리 정보도 공유하며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주던 곳이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도 꼭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하버드에 입학한 아들, 억대 연봉을 받는 사위, 때마다 명품 선물 바리바리 들고 오는 딸 부부 이야기…
그 자랑이 신성한 교회 전체를 울려 퍼질 때, 한편에서는 아들이 이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엇나가서, 밤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런 부모도 있었다.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 타고, 아들 둔 부모는 속이 탄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속이 타는 그 부모 앞에서 당당히 자랑하는 그 모습은, ’나만 잘났다‘고 있는 대로 건방을 떠는 오만함으로 비친다.
그래서일까.
어느 날 조용히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더 이상 그런 자랑질들을 듣고 싶지 않아서, 내 자식의 아픈 모습을 더는 보이고 싶지 않아서, 괜히 마음 다치고 기죽기 싫어서였던 것이다.
심지어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니, 주님께서도 이 자랑질만큼은 통제하기가 어려우신가 보다.
혼나기 전에 미리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자.
남의 마음에 상처 주는 자랑은, 결국 내 인격을 깎아내린다.
자랑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처음이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말 한마디에 천 냥 인연도 끊긴다”라는 말을 보태야 할 듯…
“지적질”
상대의 말끝마다 “그건 아니지~” 하며 정정하려 드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 말이 친구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누구든 간에 자꾸 들으면 결국 상처가 되는 것이다.
지적질은 대개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를 두르고 온다.
하지만 상대는 안다.
그게 사랑의 조언인지, 아니면 은근한 깔봄인지…
충고와 지적은 종이 한 장 차이인데, 그 차이를 구분 못하면 ‘꼰대‘ 소리 듣는 건 순식간이다.
정말 꼭 해야 할 말이라면, 뾰족한 말보다 부드러운 말, 남들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외치기보다는 조용히 건네는 용기가 먼저인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무시하는 말과 욕설이다.
”당신이 뭘 알아?“
”말 좀 그만해.“
”아휴, 답답해 정말~“
이런 말은 말이 아니라, 감정의 칼날이다.
상대를 베고, 자신도 다치는 것이다.
세상살이, 결국 남는 건 말이다.
어떤 집은 말 때문에 무너지고, 어떤 집은 말 덕분에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조언과 지적은 다르다.
이건 꼭 기억해야 할 인생의 진리 중 하나다.
조언은 ”내가 너의 편이다“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등을 토닥이며 함께 길을 찾는 말이다.
반면 지적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라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한숨까지 덧붙여가며 던지는 말이 지적이다.
어느 여고생이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지적은 듣기 싫은데, 조언은 더 기분 나쁘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맞다.
조언도, 지적도, 듣는 입장에선 결국 다 거슬릴 수 있다.
특히 내가 준비 안 됐을 때, 마음이 예민할 때, 그 어떤 말도 ‘잔소리’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일이 아니면, 지적도 조언도 하지 말고 조용히 커피나 마시자.
도움 되는 말도, 타이밍이 안 맞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차라리 침묵이 더 깊은 배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젠 남의 인생에 들이대지 말고, 묻지 않으면 말하지 말고, 도움이 정말 필요한 순간까지는 그냥 웃고만 있자.
이간질,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 사이를 찢어놓는지 당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걔가 그러는데 말이야…”
이 말이 등장하는 순간, 평화롭던 모임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그다음은 으례히 이런 식이다.
“아무개가 너에 대해 그렇게 좋게 말은 안 하더라고…”
“절대 딴 데 가서 말하면 안 돼. 나만 아는 얘기야.”
이쯤 되면, 그 말 자체보다 그걸 왜 굳이 나한테 말하는 건지가 더 궁금하다.
안 그래도 마음 복잡해 죽겠는데, 이런 말 한마디에 속은 있는 대로 뒤집어지고, 머릿속은 회전목마를 탄 것처럼 빙빙 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정작 그 말을 꺼낸 사람은 너무도 편안하다.
이간질은 대놓고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전달만 했을 뿐이라는 비겁한 방패 뒤에 숨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라는 마무리 말을 꼭 붙인다.
그건 걱정이 아니라, 불 지르고 물 뿌리는 척하는 것이다.
관계를 망치는 건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소소한 말버릇일지도 모른다.
이호선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가, “잘 늙고 싶다면 이 세 가지는 반드시 피하라”는
말씀이 가슴 한복판에 콕 박힌다.
이른바, 자랑질, 지적질, 이간질.
되짚어보니 다행이다.
자랑할 게 별로 없어서 자랑질은 애초에 못했고, 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지적질도 못해봤다.
그리고 이간질이라는 것은, 그 단어 자체가 너무도 싫어서 일찌감치 피해 다녔다.
그 덕분인지, 크게 튀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그럭저럭 괜찮게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뒤늦게라도 다시 공부할 용기를 낸 덕분에, 오히려 요즘이 내 인생의 ‘리즈시절’인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3질’을 피하면서 산다고 해도, 노년이란 길목에 찾아오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슬며시 나를 찾아온다.
사람이 그립고,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고, 때로는 따뜻하고 진정 어린 말 한마디가 눈물 나게 고플 때도 있다.
그래도 이상한 사람들 잘못 만나, ‘3질’만 해대는 인간들하고 있는 것보다는, 다소 외롭더라도 홀로서기를 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렇게 살면, 혼자 있어도 혼자인 것 같지 않은, 품격 있는 나이 듦이 조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크게 욕심부리지 말고, 그저 마음 편한 쪽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