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노후
“호모 루덴스 (Homo Ludens)”는 라틴어로 ‘노는 인간’, 혹은 ‘유희의 인간’을 뜻한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 (Johan Huizinga)가 만든 말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도구를 만드는 존재”라고 배운다.
그런데 하위징아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인간은 놀 줄 아는 존재, 호모 루덴스다.“
‘놀기’란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놀이에는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고, 무엇보다 창조성이 있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아이들이 규칙을 만들어가며 놀듯이, 인간은 놀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즉, 놀이야말로 인간 문명의 씨앗이라고 하위징아는 강조한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참 바쁘다.
하루 종일 일하고, 공부하고, 또 무언가를 준비한다.
그런데 정작 “노는 시간 있냐?"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일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일에 대한 성과, 서로 간의 경쟁, 효율, 이런 단어들이 일상을 지배한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놀이의 회복”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워라벨 (Work-Life-Balance) 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단순히 덜 일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 안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싶다는 뜻이다.
바로 ”호모 루덴스적 사고방식“이다.
하위징아가 말한 유희의 인간은, ”노는 사람“이 아니라 ”노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삶 전체를 하나의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이다.
“호모 루덴스”
이 단어를 처음 접하고 나서, 나는 남편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평생 일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라, 은퇴 후에도 여전히 하루 종일 마당 일을 하고, 심지어는
온 동네 일까지 혼자 도맡아 하고 있는 남편을 볼 때마다 늘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놀아본 적이 없으니 놀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호모 루덴스”의 의미를 알고 나니, 우리 남편이야말로 혼자 제대로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위징아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노는 사람은 단순히 노는 존재가 아니라, 노는 법을 아는 존재다.”
그 말을 곱씹어 보니, 우리 집 양반이야말로 “노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하는 정원 일과 동네 청소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삽을 들고나가 땅을 고르고, 바람이 불면 밤새 떨어진 나뭇 잎을 쓸고, 잡초가 보이면 허리를 굽혀 뽑는다.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라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남편은 개의치 않는다.
우리 집 양반한테 마당은 놀이터고, 흙은 친구이며, 매일 자라는 꽃과 풀은 함께 어울려 노는 동무다.
남편은 그 속에서 자유롭고, 삶의 의미를 느끼며 진짜로 논다.
한 가지 얄미운 것은 혼자서만 즐겁게 논다는 것.
하지만, 이제 나는 예전처럼 “일만 하는 사람”이라며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예전엔 오로지 일만 하는 남편이 이해도 안 되고, 안쓰러워 보였다.
“이젠 좀 쉴 때도 됐는데… ”
“이제는 좀 놀아도 되는데…”
그런데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이미 훌륭한 “호모 루덴스”였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괜히 미안하면서도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남편과 함께 정원을 가꾸고, 예쁜 꽃을 심고, 나무에 물을 주며 서로 웃는 얼굴로 전원생활을 즐길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더 바랄 것 없는, 근사한 호모 루덴스 부부의 탄생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허리 협착증에 무릎 관절염이 심해서 작년부터는 잡초 뽑기 등 일체 정원일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옆에 서서 말이나 걸고, 마실 거나 챙겨서 건네주거나, 잔심부름을 거들 뿐이다.
그러다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눈치만 쌓여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편은 이미 완벽한 호모 루덴스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결심한다.
“그래, 나도 나만의 호모 루덴스 길을 가야겠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인생의 즐거움까지 멈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놀이를 찾아 나선다.
새로운 걸 배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이 세 가지가 이제는 나를 살리는 나의 놀이가 되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한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책 속에서 마음을 흔드는 문장을 만나면 혼자 미소가 번진다.
그 순간,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게 바로 나의 놀이이자, 내 삶의 활력이다.
남편은 정원에서 놀고, 나는 책 속에서 논다.
비록 놀이터는 다르지만, 마음의 리듬은 닮았다.
삶은 여전히 놀라울 만큼 반짝이고, 인생은 여전히 살아볼 만한 선물임을 새삼 깨닫는다.
하위징아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존재와 행위의 본질은 놀이 그 자체이다.”
그 말처럼, 우리 인생은 거대한 놀이터다.
태어날 때부터 규칙이 주어지고,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며,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넘어지며 살아간다.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놀았느냐가 아닐까.
남편은 여전히 땀 흘리며 흙속에서 의미를 찾고, 나는 나가 다니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글 속에서 나만의 놀이를 즐긴다.
서로의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호모 루덴스“, 즉 노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놀 줄 아는 사람은 결국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삶은 길지 않다.
그렇다면 더 즐겁게, 더 유쾌하게, 마음껏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본다.
삶이란, 결국 진지하게 노는 일.
우린 모두, 이 세상이라는 놀이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춤추며 살아가는 멋진 호모 루덴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