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 행복한 노후
한국 현대시를 이야기 할 때 이성선 시인의 이름은 늘 조용히 마음에 남는다.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읽고 나면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그런 시를 쓰시는 분이다.
화려한 표현 대신, 시인은 늘 일상의 결을 조심스레 쓰다듬듯 시를 써 내려간다.
그래서 이성선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번지듯 스며든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도 참 맑고 투명하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그대로 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 이성선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시 <그냥 둔다>는, 삶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다시 꺼내 보게 되는 시다.
크게 위로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곁에 와서 살며시 등을 두드려주는 듯한, 그런 조용한 위로가 담긴 시다.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그냥 둔다 : 이성선 시인 )
이성선 시인은 이렇게 속삭인다.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두고,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두고, 그 위에 길게 드리운 산 능선조차 그대로 둔다고.
뭔가를 고치려 하지 않고, 판단하거나 정리하려 들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 태도가 이 시가 품고 있는 큰 지혜인 것 같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는 구절에서는 이유도 모르면서 나 역시 멈추게 된다.
지금 내 마음이 잠시 멈춰 서 있다면, 그 멈춤조차 따뜻하게 받아들이라는 가르침 같다.
슬픔이 밀려와도, 걱정이 길을 막아도, 두려움이 어깨를 눌러도, 지금 이 감정의 모습 그대로를 허락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성선 시인의 아주 조용한 한 문장이 그 어려움을 풀어내는 것같다.
억지로 고치려 하지 말고, 억지로 잊으려 하지 말고, 그저 지금 있는 마음과 함께 잠시 머물러 보자.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이 성선 시인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문득 우리 집 잔디밭이 떠오른다.
말이 좋아 ‘잔디’이지, 사실상 초록색 카펫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다.
지인들이 오면 입을 모아 놀란다.
“어떻게 잡초하나 없이 이렇게 잔디를 가꿀 수가 있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는다.
그 비결이라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완벽주의자의 집요한 관리 덕분이라는 사실을 남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잡초에 목숨 건 사람처럼, 어쩌다 하나씩 눈에 띄는 것도 결코 용서를 못한다.
잔디밭에 잡초가 고개만 슬쩍 내밀어도 바로 달려나가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외친다.
”꽁꽁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남편의 이런 정성? 덕분에, 우리집 앞 마당은 사시사철 잡초 한 점 없이 반듯하고 아름답게 유지된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마음이 든다.
”그냥 뒀으면 좋겠다.“
조금은 울퉁불퉁해도, 잡초 몇 포기 올라와도, 자연이 만들어내는 생김새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걸 말해주고 싶다.
저 혼자 피어나고, 스스로 자라며, 어느 날 잔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은 풀잎을 바라보는 것도 삶의 여유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여유로움을 우리 집 양반 살아 생전에는 꿈도 못 꿀듯하다.
이렇듯 현실에서는 잡초하나 허락되지 않는 집에 살고 있지만, 시를 읽는 순간만큼은 마음 속 풍경이 부드럽게 바뀐다.
시 속에서 시인은 모든 존재를 내버려두고, 자연의 생명력에게 맡기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방치가 아니라, 억지로 애쓰지 않으려는 내려놓음의 미학이다.
우리 삶 대부분의 괴로움은 감정이나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모든 일은 결국 때가 되면 스스로 정돈된다는 것을, 오래 살고보니 알게 된다.
잔디도 매일 손대지 않아도,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자라고 쉬고 다시 피어나듯, 우리의 마음 역시 자연의 흐름 속에서 변하고 치유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언젠가 우리 집 잔디밭에서도 ‘그냥 둠’의 풍경을 보고 싶다.
잡초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흰 민들레 하나가 슬쩍 피어나고, 조그만 벌레가 잔디 위를 기어가고, 바람이 스치는 대로 잔디결이 흐트러지는 모습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래, 이대로 충분히 예쁘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 집 양반이 잔디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는 시대가 온다면 가능할까?
그 전까지는 잡초 씨앗이 땅과 눈을 맞추기도 전에, 남편 손에 사라질 테니, 나는 오늘도 속으로만 외친다.
“그냥 두자~~ 그냥 두면 얼마나 좋을까.”
이성선 시인의 <그냥 둔다>라는 시는, 내게 작은 배움을 준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면 삶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이다.
감정이 어지럽다면 그대로 두고, 마음이 복잡하다면 잠시 머물고,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때를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그냥 두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마음 안의 바람이 잔잔해지고, 나 자신에게도 더 친절해질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시를 덮으며 담담히 미소 짓는다.
삶은 어쩌면 손을 내려 놓는 순간 더 아름다워지는 지도 모른다.
잡초 하나 없는 우리 집 잔디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 번 조용히 마음속에 속삭인다.
“그래, 그냥 두자. 언젠가 나도, 우리 잔디도, 내 마음도 조금은 자유로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