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 행복한 노후
노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또 한 해의 끝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자꾸만 심란해진다.
달력의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마음이 먼저 앞서가는 것이다.
올해는 유난히 그렇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둘씩 찾아온 노화라는 이름의 손님들이 자리를 잡더니, 급기야 부정맥이라는 진단까지 받아들게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단단하다고 믿었던 몸의 중심이 한꺼번에 풀려버리는 기분이 든다.
마치 팽팽하던 끈이 툭 하고 끊어진 것처럼, 온몸의 맥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감정은 거의 느끼지 않으며 살았다.
매일같이 새로워지는 세상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배우는 일이 즐거웠고, 새로운 것을 익히는 설렘 속에서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저 다음 배움으로 이어지는 통로일 뿐,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25년을 보내려는 이 시점에 서니, 이유없이 가슴이 서늘해진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조용히 마음을 감싸안는다.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하자, 그동안 애써 밀어두었던 생각 하나가 불현듯 고개를 든다.
“언젠가 갑자기 삶이 꺼질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크지도 요란하지도 않게, 아주 낮은 음으로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확실히 건강에 대한 자신이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삶 전반에 대한 믿음도 함께 약해지는 것같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일들 앞에서 망설이게 되고,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일들조차 한 번 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괜찮을까?”라고.
얼마전, 철인 같던 남편이 생전 처음으로 감기 몸살로 거의 열흘을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아, 이 사람도 이제 노인이구나~~”라는 사실을 가슴아프게 받아들였다.
다행히 미리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 두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정말 큰일이 날 뻔 했다.
노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노인에게 감기는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것을…
폐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예전에는 독감으로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몸살쯤이야 며칠 쉬면 낫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감기와 독감이, 한순간에 삶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생전 맞지 않던 독감 백신도 챙기고, 폐렴 예방주사까지 미리미리 맞게 된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남에게 민폐끼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마음에 가깝다.
이번에 우리 집 양반이 드러눕는 모습을 지켜보며,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 이 사람이 다시 못 일어나면 어쩌지?”
그 생각이 들자 불안한 마음에 밤에도, 낮에도 안절부절 못하며 자꾸만 남편의 숨소리를 살폈다.
이 사람이 없다면…
그 다음 생각은 도저히 나아가지를 못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넓은 집을 내가 혼자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마당의 잔디는 누가 깎고, 밤이 되면 무서워서 어찌 살아갈까.
혼자서 온갖 상상 다해갈 수록 마음은 더 깊이 가라앉고,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동안 속으로 삼식이 아저씨라 부르며 원망도 많이 했다.
하루 세끼 식사에, 집에만 있으려는 남편바람에 한숨도 참 많이 쉬었다.
그러나, 막상 철인같던 신랑이 드러눕는 것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삼식이든, 오식이든, 육식이든 상관없으니 그저 제발 건강하게 내 옆에만 있어 달라고 조용히 기도한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얄미운 남편이다.
그래도 이번 병간호를 하며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무심한 남편이라도, 이 사람은 여전히, 아니 이제는 더더욱 내게는 하늘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늙고 병들면 정말 부부 말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이토록 뻐아프게 다가올 줄 몰랐다.
자식도, 형제도, 친척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서글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결국 서로의 숨결을 확인해주고,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건 함께하는 노부부뿐이다.
그래서 또 하나 배운다.
살아 있을 때 더 잘해야겠다.
서로를 아끼며, 사소한 짜증 대신 조금 더 많은 사랑을 남겨두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
오늘도 남편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본다.
아직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고,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
이 말이 이렇게 실감 나는 나이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칠십대에 접어들고 나니, 달력은 마치 누군가 뒤에서 몰래 넘겨주는 것처럼 정말로 순식간에 넘어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고,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해가 기운다.
붙잡을 새도 없이 하루가, 한 달이, 또 한 해가 흘러가 버린다.
젊었을 때는 마냥 세월이 더디기만 했다.
너무도 힘들 때는 시간이 조금만 더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는 날들이 이토록 빨리 찾아올 줄은…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문득 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떠오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 노래를 들으며, 그저 분위기 좋은 가사쯤으로 넘겼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 한 소절이 가슴에 그대로 내려앉는다.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애잔하게 들린다.
세월은 정말 물처럼 흐른다.
조용히, 그러나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칠십대가 되고 보니, 세월이 빠르다는 말 속에는 아쉬움과 감사가 함께 들어 있다.
아쉬움은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구나~~”하는 마음이고,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기까지 잘 살아왔구나~~”하는 안도감이다.
이제는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려 한다.
흘러가는 세월을 원망하기보다는, 흐르는 물가에 잠시 앉아 그 곁을 바라보듯 하루하루를 조용히, 그리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
비록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어도, 남은 세월을 어떻게 건너갈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급해하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 그저 오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보자.
칠십대의 시간은 그야말로 유수와 같다.
빨라도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래서 더욱 더 소중하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이렇게 또 하루가 흘러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스스로에게 작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노년의 불안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그림자 같다는 것을…
없애려 할수록 점점 더 커지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작아진다는 사실도 노인이 되고 나니 깨닫게 된다.
책을 읽다 말고 안경을 고쳐 쓰며 웃고 있는 사진 속의 할매처럼, 오늘의 나에게 살포시 말을 건네본다.
설사 ‘노년의 불안’이라는 말풍선이 떠오르더라도, 그 옆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아도, 마음이 자주 흔들려도, 불안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가지만, 그 물길 위에서 허둥대지 않고 잠시 책장을 넘기듯 하루를 넘길 수만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노년이 아닐까…
이제야 조금 알겠다.
노년의 불안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다시 한결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잘 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