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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글할매 Jan 11. 2024

나의 자존감은 남편에 의해 좌우된다

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나의 자존감은 남편에 의해 좌우된다”


제목을 근사하게 적었다^^


정말 너무나 서글프고 기가 막힌 일인데도 역시 글을 쓰려니까 제목에 빵 하고 터진다. 이래서 글을 쓰다 보면 그 누구도 못해주는 진정한 위로를 받나 보다.


한 일주일 전에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고는 그야말로 한 숟가락 남은 것을 우리 집 양반 성질을 알기에 버리지 않고 깨끗한 작은 접시에 옮겨 랩으로 씌운 다음 냉장고에 넣었다. 다음 날 내가 먹어야지 하면서..


이것이 사단을 일으켰다. 언제 나 없을 때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다가 랩으로 씌워놓은 카레 한 숟가락을 본 모양이다. 그러고는 어제 점심 먹는데 갑자기 카레 한 숟가락 남은 것 꺼내오란다. 마침 대정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서 그 비싼 옥돔 한 마리 사 갖고 와서 우리 집 양반 좋아하는 식으로 프라이팬에 기름 자작하게 두르고 노릇노릇 아주 바싹하게 구워놓고 제주 숨비라는 두부로 찌개도 맛있게 끓여서 정성껏 상을 차리면서 몇 일째 냉장고 안에서 말라붙은 카레라이스 한 숟가락을 버렸다. 그것도 신랑 새로운 음식 맛있게 먹이려는 갸륵한 마음에 버렸는데 이 마당에  굳이 그 한 숟가락 남은 카레를 찾는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


계속 찾기에 쭈삣거렸더니 눈치 빠른 양반이 소리를 꽥 지른다. 버렸냐고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걸렸다 하는 날에는 최소 한 달짜리는 될 것 같았다. 아마도 오늘이 내 운명의 날인가 보다. 할 수 없이 안 먹을 것 같아서 버렸다고 이실직고했더니 드디어 난리가 났다. 무슨 살림하는 여자가 음식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버리냐면서 그러다가 죄받는다고 그야먈로 난리부르스가 따로 없다.


그러더니 결국은 다 차려놓은 점심을 안 먹겠단다. 그 고약한 성격이 또 발동을 했다. 어쩌겠는가… 사주팔자에 늘 등장하는 내 팔자인 것을 ~~


결국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두 번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면서 간신히 식탁에 데리고 와서는 또 비굴하게 이것 먹어봐,  저것 먹어봐 하면서 팔십이 넘은 신랑 비위를 맞췄다. 이럴 때의 내가 제일 불쌍하고 슬프다. 이 나이에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든다.  설거지 하면서 괜히 눈물이 나길래 남편 몰래 맥주 한 캔을 따서 조심스럽게 마시면서 설거지를 했다.


늘 이런 식이다. 이러니 어떻게 할매의 자존감이 올라가겠는가… 참으로 한심하고 처량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젊었을 때는 젊어서 참았다지만 칠십넘은 이 나이에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서슬픔이 밀려온다.


물론 나도 음식 버리는 것을 너무 싫어하지만 워낙에 조금 먹는 신랑과 그런 신랑보다 조금 덜 먹는 내가 함께 하다 보니 아무리 음식을 조금씩 만들어도 늘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옛날 전쟁을 치르고 살았을 때는 정말로 쌀 한 톨도 당연히 아껴야 하지만 이제는 세상도 바뀌었고 그 정도로 아껴야 할 정도는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가 그야말로 쫓겨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어떨 때는 차라리 쫓겨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 없으면 자기 전화번호도 못 외우고 혼자서 밥도 차려먹지 못하는 사람이 어쩌자고 그 고약을 떨어대는지 정말로 하느님도 무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하지만 타고난 모자란 성격 탓에 참 지지리로 못나게 이런 고약한 신랑 비위를 있는 대로 맞추고 살다 보니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양 왕자병까지 걸려있다.  어쩌겠는가… 이제는 살아온 날 보다 앞으로 남은 날이 넉넉하지 않음을 알길래 참고 또 참는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때는 살짝 미안해하니까 그 정도만으로도 위로를 삼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젊어서부터 워낙 손이 크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왔고 미국에서도 제법 큰 식당을 오래 하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큰 손이 더 커졌었다. 늘 남을 배부르게 해 먹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먹다가 남으면 보따리 보따리 싸서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늘 혼자서 중얼거리던 소리가 있다. 난 천국에는 못 가더라도 음식 봉사만큼은 확실하게 해서 아마 지옥에는 안 가고 연옥 어딘가는 가지 않겠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노인이 되니까 입맛이 자꾸만 떨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입 맛이 떨어지는데 이렇게 냉장고에서 더 맛없게 변한 한 숟가락남은 카레를 꼭 먹어야 하는 생각에 아까워하면서도 할 수없이 그냥 버렸다. 아까운 생각이 없었으면 애당초 처음부터 버렸을 것이다. 이게 무슨 날 벼락을 맞을 만큼 잘못한 일인지 난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늘 혼나면서 살다 보니 오늘은 왜 또 혼나는지 영문도 모른채 그저 또 혼난다.


매일 새로운 밥에 새로운 반찬을 한다고 또 혼난다. 요즘 세상에 어느 누가 이렇게 하루 세끼 지극 정성으로 차리는지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나 보다. 이런 마누라 구박하다가 정말 혼난다고 속으로 계속 중얼중얼 거리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다 재수 없으면 중얼거린다고 또 혼난다.


공부하면서 기껏 높여놓은 나의 자존감은 그야말로 남편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곤두박질을 친다. 그냥 늘 혼나면서 사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그러려니 하면서 살다가도 가끔 한 번씩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왜 매번 남편에 의해서 내 자존감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지 그것이 속상한 것이다.


난 우리 집 양반 표현대로 약간 모자라는지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있다가도 자고 나면 싹 잊어버린다. 그래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면서도 그 새로운 아침이 너무도 행복하다. 새벽을 여는 그 순간이 너무도 황홀하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내 나름대로 새벽 루틴을 만들어서는 매일같이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내가 그렇게 대견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서투른 글이라도 매일 아침 일기를 쓰고 이제는 브런치라는 것도 하고 있다 보니 그렇게 자존감이 팍팍 올라갈 수가 없다.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면서 혼자서 비실비실 웃기도 하면서 자아 도취에 빠져있다가 영락없이 남편에 의해서 또 좌지우지되어 버린다.


난 무슨 특별한 행운 같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 신랑의 기분이 좋아서 하루가 무탈하기를 바랄 뿐이고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커피 한잔,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캔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게다가 제주도로 이사 와서는 근사한 내 서재가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오늘 하루의 남편 기분이 어떠냐에 따라서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 너무도 속상하고 슬프다.


힘들게 올려놓은 나의 자존감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너무 싫다. 아무리 그 세대는 그랬다고 하지만 그 끔찍한 전쟁을 겪은 세대라고 나름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고 해도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같다.


더 더 군다나 미국에서 거의 오십 년이나 살다가 온 사람이 그 꼰대 마인드는 왜 못 버리는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그 고약한 성질만 고치면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다. 늘 아끼고 아껴서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자는 사람이다. 그런데 또 고약한 것은 남을 도와주는 것까지는 나 역시 함께 하는데, 왜 꼭 나 먹는 것을 줄이면서 도와주라고 하는지 이것 또한 미칠 노릇이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적게 먹는다고 딸애가 걱정을 하는데 왜 허구한 날 나보고 먹는 것 줄이라고 하는지 그야말로 웬수가 따로 없다.


난 억울하다.


나도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싶다. 그러면서 같이 나눠줄 것 있으면 나눠주고 하면 되는데 왜 꼭 먹는 것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인 사람한테 그 쪼끔 먹는 것까지 줄이라고 하는지 섭섭하고 원통해서 죽겠다. 외식이나 자주 시켜주면서 외식을 줄이라고 하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다.


어디 삼식이 아저씨가 함부로 나한테 집에서 먹는 것까지 줄이라고 하는지…


아~~ 하늘도 정말로 무심하시다.


난 음식을 먹을 때 늘 기분이 좋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 맛있다.”라고 하면서 행복해하는 리액션이 많다. 그리고 위가 안 좋아서 소화가 잘 안 되다 보니 천천히 먹는다. 밥이라는 것은 후다닥 배고픈 것만 챙기고 빨리 먹고 일어나야 하는 우리 집 양반이 보기에는 마냥 느긋하게 많이 먹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난 맛을 음미하면서 먹고 싶고 기왕이면 예쁜 접시에 담아서 우아하게 먹고 싶다. 우리 집 양반한테는 절대로 통할 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 집 반찬은 손님이 오기 전에는 늘 뚜껑 있는 유리그릇에 담아놓고는 먹을 때마다 냉장고에서 그대로 나와서 뚜껑만 열고 닫는다.


이럴 때 또 영락없이 나의 자존감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난 우아하게 분위기 잡으면서 먹고 싶다. 그릇에 일일이 옮기다 보니 묻혀서 버려지는 양념도 아깝고 그릇을 씻어야 하니까 물도 절약이 안된단다. 자린고비도 이런 자린고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남한테 베푸는 것은 전혀 아까워하지를 않으니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남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참으로 연구할 것이 너무도 많다. 여러모로 연구 대상인 것이다.


그나마 둘이서 유일하게 잘 통하는 것은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은 배불리 먹여서 보낸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배고픈 시절에 살았던 사람이라서 그런다고 치더라도 나는 어릴 적에는 꽤 잘 살던 집안의 딸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먹는 것에 대한 손이 크다.


남들 해 먹이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남들하고 어울려서 맛있는 것 먹으러 가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다. 그래서 난 늘 사람들한테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라고 한다. 손님이 오는 날이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불쌍한 신세가 됐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히 세상이 변하긴 했나 보다. 그전에는 우리가 늘 밥을 사니까 항상 사람들이 끓더니 이제는 각자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아무리 밥 사준다고 해도 잘 안 온다,


오죽하면 우리 집 양반이 제주도로 이사 가면 아마 사람들이 찾아올 거야 하는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확실히 제주도로 이사를 오니까 안 오던 사람들도 연락이 오더라. 일단은 비행기표만 끊어놓으면 제주도 여행이 공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숙식 제공에 차량까지 비용이 만만치가 않은데 그래도 난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 덕분에 나도 같이 구경 다니고 맛 집도 찾아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얼마 안 됐을 때 하루종일 일하고 오는 신랑이 안쓰러워서 내 딴에는 다이닝테이블에 예쁘게 상 차려놓고 아끼던 촛불을 양쪽에다 아주 우아하게 켜놓고는 새색시 심정으로 신랑을 기다렸다. 퇴근해서 돌아온 신랑이 식탁을 보더니 씻기도 전에 식탁으로 가길래 감동을 받아서 저런가 보다 했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대로 촛불가까이 가서는 아까운 초를 왜 키냐고 하면서 촛불을 끄는 순간 나의 행복하고 우아한 결혼 생활에 대한 착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때부터 남편에 의해 좌우되는 나의 자존감의 역사가 시작된 것 같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식탁에 촛불을 켜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억울하고 속상하다. 나도 자존감 있는 여자인데 왜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자존감을 이리도 짓밟는지 너무 속상해서 미칠 지경이다. 나의 자존감을 지키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오히려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던 때가 더 자존감이 높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아무리 가방 끈이 짧았어도 직장에 다니거나 내 비즈니스를 할 때 오히려 더 자신감을 갖고 살았던 것 같다. 하물며 그 말 안 통하는 미국 땅에 살면서도 비록 영어는 서툴더라도 절대 기죽지 않고 살았었다.


난 영어를 잘 못한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면 절대로 미국 사람들은 고약하게 굴지를 않는다. 거의 모든 미국 사람들이 내가 먼저 영어를 잘 못한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못하면서도 아닌 척하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그런 것을 미국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했다.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일단은 사람은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살다 보면 아무리 말이 안 통하는 나라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있더라.


그렇게 열심히 지문이 닳도록 살아온 덕분에 지금 이렇게 그토록 그리워하던 내 나라로 돌아와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데 이렇게 가끔 한 번씩 태클을 걸어대는 고약한 삼식이 아저씨 덕분에 행복에 대한 정의가 흔들린다.


그래도 아무리 고약해도 남편이 옆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변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그냥 또 쓸쓸히 웃는다.


내 자존감은 남편에 의해서 좌우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완전히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살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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