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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May 12. 2023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가 죽음을 맞은 이유

화성이 남두육성을 만났을 때

 중국의 삼국시대에 나오는 왕릉은 왕윤의 조카로 회남 지방의 일인자가 된 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결국 독을 먹고 자살하게 된다. 왕릉의 난이 일어난 것이 서기 250년인데 이때 왕릉은 화성이 남두(南斗)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고귀해지는 인물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자신이라 여기고 사마의와 위나라 황제 조방까지 폐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럼 이때 왕릉이 본 화성이 남두로 들어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A.D. 250년 왕릉의 난 발생 시 화성의 운동

 이때 화성은 4월 말부터 역행을 시작해 7월 경 정확히 남두성 가운데로 들어가 위치한 것이다.

 천문류초와 그 원전인 통지(通志) 천문략(天文略)에서는 해·달·오행성이 두성(斗星)에 역행하며 들어오면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日月五星逆入天下流蕩)이라 했는데, 통지는 송나라 때 정초가 쓴 책이니 왕릉의 난을 참고하여 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삼국지의 왕릉의 난처럼 화성이 역행하여 남두로 들어온 사건이 또 있는데 다름 아닌 1623년 6월,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임금에 등극한 지 3개월째 되는 시기였다.

1623년 화성의 남두 역입(逆入)

 왕릉의 난이 일어난 250년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게 화성이 남두(南斗) 별자리로 역행하여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623년 화성의 천구상 역행 경로


 화성이 두수의 국자 모양의 네 별 안으로 진입하는 시기는 7월 13일(음력 6월 16일)이며, 일주일 뒤인 7월 20일(음력 6월 23일) 이후로 완전히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였다. 바로 이때인 인조 1년 6월 23일에 다음과 같이 실록에 기록이 있다.


밤에 화성(火星)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夜, 火星入南斗。

- 인조실록 인조 1년 6월 23일 기록


 비록 화성이 역행을 시작한 지는 좀 되었지만 관상감에서는 계속 관망하다가 완전히 두수 별자리 안으로 들어가자 보고를 한 것이다. 이틀 뒤인 6월 25일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제 석강(夕講)을 행하였을 때, 이시발(李時發)이 아뢴 내용은

 “피란한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 강토에 있는 자가 부지기수로 많으니,  접반사(接伴使) 이상길(李尙吉)에게 하유하여  잘 주선하여 등주(登州)로 이송하소서.”라는 일과,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갔다고 하니, 이경여(李敬輿)가 아뢴 바에 따라 재앙을 없앨 방도를 생각하소서.”라는 일이었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년 6월 25일 기록


 전날인 24일 석강 경연에서 형혹성(화성)이 남두에 들어간 일이 언급되었는데, 검토관이던 이경여가 말한 '재앙을 없앨 방법'을 강구하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앙'은 무엇일까. 다시 전날인 6월 24일의 실록 기록을 보자.


시독관 윤지경(尹知敬)은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폐조에게 오랫동안 동궁의 관속으로 있었습니다. 지금 폐인은 종묘사직에 죄를 얻었는데 신의 몸은 아직도 경연의 반열에 있으니, 창읍왕(昌邑王)의 사부(師傅)가 죄를 입은 경우와는 다름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조의 충후한 도(道)이기는 하지만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가령 폐인이 명에 순종하여 마음을 편히 갖고 천수를 마쳤다면 국가에 난처한 일이 없었을 터인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이른바 ‘스스로 만든 재앙은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폐인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나의 뜻은 그래도 문제 삼지 않고 싶은데 국론이 이와 같으니, 나 역시 어쩔 수 없다." 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1년 6월 24일 기록


 여기서 말하는 폐조는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말하고, 폐인은 바로 광해군의 아들이자 폐세자인 이지(李祬)를 말한다. 폐세자 이지는 강화도에 유배당한 상태였는데 위리안치된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가 잡히고 말았다. 승정원일기에서 나온 '재앙'이란 바로 폐세자 이지를 말하고 재앙을 없앨 방법은 폐세자 이지를 죽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인조는 국론이 이와 같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하였다.

 이틀 뒤인 6월 27일 승정원일기에 이지의 유배지였던 강화 목사로부터 이지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폐세자 이지는 음력 6월 25-27일 사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 확실하다.


 폐세자 이지는 왜란이 끝나지 않은 1598년에 태어나 10살이 되던 해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세자에 책봉되었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는 이미 24살로 장성한 청년이었다. 사촌지간인 능양군(인조)은 이 때 27살로 불과 3살 차이였던 것이다. 선조가 방계의 혈통이고, 광해군이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이런 것을 떠나 적어도 이지만큼은 광해군의 적장자로 왕위의 정통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반정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화정

 인조반정이 있던 1623년 3월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 그리고 이지의 부인인 폐세자빈 박 씨는 모두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음력 5월 22일 폐세자 이지가 위리안치된 집안에서 땅굴을 파 탈출하였다가 3일 만에 잡히고 만다.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지를 죽여야 한다고 인조를 체근하였고, 여기에 광해군과 철천지 원수인 인목왕후도 거들었지만 인조는 한 달이 넘도록 윤허하지 않고 심지어 승정원일기에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폐인 이지에 대해서는 시원스레 공론을 따르소서.”라는 일이었는데, 답하기를,

나는 이러한 논의가 그대들에게서 나올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니, 놀랍고 괴이함을 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논의를 하지 말아서 내 마음이 놓이게 하라.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년 6월 18일 기록


 폐세자 이지를 처형하기 일주일 전까지도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 옥당(홍문관)의 자문을 듣고 '너희까지 이럴 줄 몰랐다'라고 할 정도로 신하들의 주장을 반대하는 인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인조가 폐세자 이지의 처형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왕족이기 때문이란 말은 조선 왕조의 역사를 보면 우습기 그지없고, 적어도 당시에는 제거하고 싶어도 시기상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지가 유배지를 탈출한 죄를 지었지만 인조에게는 선뜻 이지를 죽여야 할 명분이 약했고 이지를 죽였을 경우 생길 수 있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광해군이 실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난다 해도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정통성 있는 후계자는 능양군이 아니라 세자 이지였기 때문에, 함부로 그를 제거한다면 그로 인한 백성의 반감, 당시까지도 숙청되지 않았던, 기자헌, 유몽인과 같은 북인의 잔존 세력들, 비록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끌어들였지만 본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남인 세력들과 이들과 연결된 군부가 일으킬 반발이 두려웠던 것이다.

 폐세자 이지는 단순히 위리안치가 답답하여 탈출한 것이 아니라 배를 구하여 황해도로 건너갈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조반정을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정(反正)은 그들이 부르는 말이지 역모와 동의어이기 때문에 반정이 일어나고 불과 두 달이 지난 시점에 반정 세력을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으로 이지는 충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폐세자 이지의 처분을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웬걸, 하늘이 도운 것일까. 천인감응론에 심취한 당시 사림들에게 딱 맞는 천변, 즉 형혹성(화성)이 남두로 들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때마침 일어난 '재앙'을 빌미로 한 달 가까이 이지의 처형을 반대하던 인조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속전속결로 이지를 처형해 버렸다.

 만약 폐세자 이지가 조금만 더 와신상담하며 경거망동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땠을까. 화성이 남두로 들어간 재앙은 그가 아니라 불과 반년 뒤 이괄의 난으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공주까지 도망쳐야 할 정도로 휘청하였고, 명나라로부터는 그때까지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때 탈출하려다가 애꿎은 천변(天變)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는지. 어쩌면 다시 인조를 몰아내고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던 폐세자 이지는 능묘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는데 최근 남양주 수락산에 그의 묘소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상 속의 대체 역사이지만 세자 이지의 선택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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