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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Jan 03. 2024

북쪽 대장별

선조 시기의 객성들, 그리고 성웅 이순신

 김한민 감독의 임진왜란 3부작이 끝을 맺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를 떠나 명량 해전부터 한산, 노량 해전까지 아우르는 전쟁 대서사의 영화 시리즈를 가졌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은 이 영화에서 배역 또는 언어에 상관없이 자신이 가진 연기의 역량을 최선을 다해 이끌어내는 모습이었다. '최종병기 활'에서부터 보이던 김한민 감독의 사극 액션 연출은 영화 '노량'에서도 흠잡을 데 없었다. 조, 명, 일, 세 나라의 난전이 벌어지면서 명나라 군사에서 조선 군사로, 다시 일본 군사의 시점으로 넘어가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노량'을 아무런 스포 없이 극장에서 보는 것을 소원했기에 영화 시작 전까지 인터넷에 일부만 보여도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나였지만 나무위키에서 ㄱㅎㄱ으로 배우 ㅇㅈㅎ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 본 편 내내 나오지 않길래 쿠키 영상이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쿠키 영상은 특히 나에게 감명으로 다가왔다.

북쪽 대장별

 '북쪽 대장별'. 영화 중반 진린의 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북쪽에 밝게 떠있는 대장별이 있어, 별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저 별 덕분에 조선의 명운이 다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북쪽의 대장별은 너무나 밝게 보여 낮에도 하늘에 떠 있는 모습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에 소름 돋는 장면이라 '와, 김한민 감독이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7년의 전쟁으로 인해 사초뿐만 아니라 승정원 일기도 소실한 당시의 조선이라 선조실록에는 많은 기록이 누락되었지만 그래도 여러 번의 '객성(客星)'의 기록이 존재한다. 따라서, '북쪽 대장별'은 비록 영화의 재미를 위한 각색일지 몰라도 마냥 허구라고 돌리기에는 근거가 있는 소재이다. 그중에는 공교롭게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우연의 일치도 있어 언젠가 이것도 정리해 봐야지 하던 참이었다.

 그렇다면 '북쪽 대장별'은 정말로 있을 수 있었는지, 16세기말의 밤하늘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티코 브라헤의 초신성 SN1572

SN 1572

  1572년 11월 2일, 북쪽 밤하늘의 대표 별자리인 카시오페이아 자리에서 초신성이 폭발하였다. 이것을 최초로 발견하였는지는 몰라도 이듬해 관측 기록을 책으로 출판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이 유명한 관측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이기 때문에 이 초신성을 '티코의 초신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초신성 잔해(Supernova Remnant) 목록에 SN1572로 기재되었고 카시오페이아자리 B라고도 부르는 이 초신성은 발견 시점인 1572년 11월에 -4등급의 밝기였다고 한다. 티코 브라헤는 그의 저서  《드 노바 에트 눌리우스 아이비 메모리아 프리우스 비자 스텔라 (De nova et nullius aevi memoria prius visa stella)》("누군가의 생애 중이나 기억상으로도 본 적인 없는 새로운 별에 대하여", 1573년 초판, 1602년 및 1610년 요하네스 케플러의 감수에 의하여 재판됨)에 초신성의 위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그려 놓았다.(출처 : 위키피디아)

<드 노바 스텔라>에 그려진 SN1572의 위치 (알파벳 I)
SN1572의 실제 위치

 이 초신성의 기록은 율곡 이이의 저서인 '석담일기'에도 나오며 같은 내용으로 선조 수정실록에 기록이 존재한다.


'객성이 책성(策星) 주변에 나타났는데 금성(金星) 보다 컸다.

 朔甲寅/客星現於策星之側, 大於金星。

 - 선조수정실록 6권, 선조 5년(1572) 10월 1일 갑인 1번째 기사


 여기서 책(策) 성은 위 그림에 나오는 카시오페이아의 다섯 별 중 가운데인 카시오페이아 감마 별을 말한다. 음력 10월 1일은 양력 11월 6일이며, 밝기의 정도를 금성보다 컸다고 하여 -4등급 정도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할 만한 기록이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 별은 1574년까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였다가 이후 소멸되었다고 한다. 아래 그림은 SN1572의 발견 시점에서부터 시간에 따른 광도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이다. 발견시점에서 대략 5-6개월까지도 1등급의 겉보기 밝기 등급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1572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0년 전이기 때문에 노량해전이 있던 1598년의 SN1572는 당연히 육안으로 관측할 수 없는 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572년이 바로 28세의 이순신이 훈련원 별과 무관 시험을 보던 바로 그 해였다. 이때 낙마하여 부러진 다리를 버드나무껍질로 동여매어 남은 시험을 봤지만 결국 낙방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시 이순신이 보았던 훈련원 별과 시험의 날짜는 자료의 실전으로 알 수 없지만, 같은 해 열린 두 번째 별과 시험이 음력 12월 2일인 정확한 사료가 있고, 이순신 장군이 시험을 본 계절이 가을(음력 7-9월)이므로 음력 10월 초신성이 폭발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하늘에 객성이 밝았을 때 어딘가에서 낙방의 쓴 잔을 들이키며 절치부심하던 이순신을 그때는 누가 알았을까.

 어쨌든 SN1572는 '북쪽 대장별'이라 하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다. 그리고 초신성이 폭발했다면 현재 그 초신성의 잔해가 보여야만 하는 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1592년부터 1598년에 터져서 남은 초신성 잔해, 즉 SN1592나 1598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선조실록에는 선조 37년인 1604년 음력 9월부터 이듬해인 1605년 3월까지 지금의 전갈자리인 미(尾)수 별자리 부근에 객성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 기록 같은 경우 현재 SN1604로 명명된 초신성 잔해가 남아 있다. 특히 실록에는 미수 별자리 수거성으로부터 동쪽으로 11도, 거극도(북극성으로부터 떨어진 고도) 109도로 정확히 좌표까지 기록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

1604년 초신성 잔해 SN1604의 위치

 그런데 선조실록에 기록된 객성 중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선조 25) 10월 27일부터 1593년 2월 26일 사이 약 4개월 동안 왕량(王良)이란 별자리 동쪽에 나타난 객성 관측 기록이 존재한다.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왕량성의 동쪽에 한 개가 나타났었고, 이후 왕량 1성과 2성 사이에 한 개가 더 생겼다.

 왕량 1성과 2 성은 위에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W자형으로 보았을 때 가운데 카시오페이아 감마별의 오른쪽 두 별인 알파(Caph)와 베타(Schedar)이다. 그러나 아래 그림의 붉은 선인 두 별 사이에는 초신성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카시오페이아 주변의 초신성 잔해 위치(노란색 화살표)

 그림의 화살표로 표시된 별 모양들은 SN 1572 외 존재라는 초신성 잔해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1598년 근처에 폭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잔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객성의 기록은 존재하지만 초신성 잔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과연 어떤 종류의 별이었을까.


카시오페이아 근처에 즐비한 볼프-레이에 별들


 어쩌면 SN1572도 초신성 폭발 직전에는 '볼프-레이에(Wolf-Rayet) 별'이었을지도 모른다. 볼프-레이에별은 아주 무거운 질량을 가진 항성의 최종 진화 단계로,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외피층을 자신의 강력한 항성풍으로 날려 보내어 내핵이 드러난 별이다. 죽음을 앞둔 별이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하여 이러한 별들은 우주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밝기의 변화가 대단히 큰 별들인데, 이러한 볼프 레이예 별로 진입하려는 대표적인 별이 바로 용골자리 에타별이다.


용골자리 에타(η) (출처:NASA, ESA, N. Smith (University of Arizona), and J. Morse (BoldlyGo Institute))
용골자리 에타 별의 광도 변화

 유명한 천문학자 애드먼드 헬리가 1677년 이 별을 항성 목록에 수록했을 당시에는 4등성이었는데 1730년 밝아졌다가 1782년에 다시 돌아갔고, 이후 1843년 -0.8등급까지 밝아진 것이다. 이 밝기는 카노푸스를 뛰어넘어 시리우스 다음으로 밝은 등급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다시 어두워져서 7등급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우주의 시간 차원에서 볼 때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별의 밝기가 급격히 변한 것으로 그만큼 불안정한 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볼프 레이예 별이나 그에 준하는 초거성들이 과거에 얼마나 많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를 반복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러한 볼프-레이예 별도 초신성 잔해처럼 목록이 있고 볼프-레이예의 첫 글자인 WR##로 명명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카시오페이아 자리 근처에 있는 볼프-레이예 별들의 위치를 나타낸 것이다.

카시오페이아 자리 근처의 볼프-레이예 별들

 아쉽게도 카시오페이아 알파와 베타 사이에 정확히 있지는 않지만 HIP3415(WR1), HIP5100(WR2), HIP7681(WR3), HIP117034(WR158) 별이 북극(그림 오른쪽)을 기준으로 카시오페이아 알파인 카프(Caph) 별 근처에 동서로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WR1,2,3 은 목록의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볼프-레이예 별 목록이 처음 생긴 1884년부터 관측되었던 별들이다. 이미 19세기부터 그 밝기의 변화가 관측 천문학자들에게 인식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150여 년 전에도 밝기 변화가 인식되었던 별이 오백여 년 전에는 어떤 밝기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천체가 아닌 사주에서의 '장성살(將星殺)'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사실 '북쪽 대장별'의 소재가 된 구체적인 실재 근거는 노량 해전 직전에 진린과 충무공이 주고받은 편지에 있다.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의 비문에는 답진도독린서(答陳都督璘書)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답진도독린서(答陳都督璘書) 1598.11.17(戊戌)

<진린 도독이 이순신에게 보낸 편지>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사람의 일을 살펴왔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니 멀지 않아 공(公)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무후(武候 : 제갈량)의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진린 도독에게 답하는 글 (答陳都督璘書) >

 저는 충성이 무후(武候)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합니다. 세 가지 모두 다 무후만 못하므로 비록 무후의 법을 쓴다 한들 어찌 하늘이 들어줄 리 있겠습니까?'

吾夜觀乾象。晝察人事。東方將星將病矣。 公之禍不遠矣。公豈不知耶。何不用武侯之禳法乎。 <陳璘>

吾忠不及於武侯。德不及於武侯。才不及於武侯。 此三件事。皆不及於武侯。而雖用武侯之法。天何應哉。

- 박기봉,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날짜 상으로 충무공이 전사하기 이틀 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진린은 '동방장성'이 희미해지는 것을 충무공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천문을 보았다는 말은 직역하여 밤하늘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주역이나 사주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점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주역에 통달하여 전투가 있기 전에 주역점을 쳤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시의 연월일시를 해석하여 풀었을 때 이순신 장군이 가진 '장성살'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장군 본인도 알고 있지 않느냐는 진린의 물음이었을 수도 있다.

 장성살은 십이운성에서 제왕에 해당하고, 당시 이순신 장군의 장성살이 대단했기에 선조 또한 그를 견제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외에도 카시오페이아 근처인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자리에 해당하는 곳엔 천대장군(天大將軍)이란 별자리가 있고 여기서 대장별인 천장군성은 안드로메다 감마인 알마크라는 별로 2등급의 4중성이다. 이곳에는 장군도 있고 군사 있고 심지어 배(天船)를 나타내는 별자리도 있다.  이렇게 동양 별자리는 점성학과 겹치며 서양과는 다른 묘미가 있다.

 어떤 별이 밝았던 간에 고금을 통틀어 가장 밝았던 한 사람이 이 땅을 지켰던 것은 확실하다. 오죽하면 영화에서의 창작이긴 해도 오직 이순신을 제거해야만 하는 전투라는 고니시가 제시한 명분에 말을 노장 시마즈도, 그 장면을 보는 관객도 수긍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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