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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Nov 18. 2022

조선일관 조헌조

1539년 일식 사건

 때는 중종 34년인 1539년 음력 9월 1일 아침, 갑자기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오늘 일식(日蝕)의 변이 있을 듯한데 이른 아침에는 구름에 가리워서 태양을 볼 수가 없었으나 해질녘에 볼 수 있었는데, 태양의 손방(巽方)이 이지러졌으니, 이는 반드시 일식일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아룁니다."

今日似有日蝕之變, 而早朝雲氣蔽塞, 故不知見, 而日晩見之, 則巽方虧缺。 此必日蝕也, 敢啓。

- 중종실록 중종 34년 9월 1일 을미 1번째 기사


 여기서 국역의 오류가 있는데, 태양을 해질녘에 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늦게나마 볼 수 있었는데(日晩見之)라고 해석해야 한다. 다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일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른 아침에는 구름에 가리어져 고로 볼 수 없었고 늦게나마 볼 수 있었는데, 손방(동남쪽)이 이지러졌습니다. 이는 반드시 일식일 것이기에 아룁니다.'

 그렇다면 이 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위 동영상이 이 날 아침에 있었던 부분일식의 모습이다. 한양에서 보았던 일식은 해가 뜨기 전에 이미 진행 중이었는데 당시 날씨가 구름이 많아 일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일식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구름이 걷혀 태양의 왼쪽 아래, 즉 동남쪽 방향이 살짝 가려져 있는 부분이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관상감에서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일식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데 있다. 일식의 대비란 당시 조선 시대에서 일식은 흉조로 여겼기 때문에 임금이 목욕재계 후 구식례를 진행하고 당일 모든 관원들이 업무를 중지하며 일식의 흉조를 타개할 대책을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구언(求言)등의 절차 등을 말하는 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일식, 월식 등의 천문 현상을 대수롭게 보지 않았던 연산군과 달리 중종과 그를 임금으로 추대한 사림파, 이 꼴통 성리학자들은 천인감응론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구름이 걷히지 않았다면 있었는지도 몰랐을 이 일식 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중종은 당연히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관상감 영사이기도 한 영의정 윤은보 등이 대답하기를,


 내편(內篇)과 외편(外篇) 및 《대명력(大明曆)》을 즉시 두루 상고할 수 없으나 평상시 일식·월식을 마련할 때 내편법(內篇法)을 위주로 해서 사용합니다. 오늘 이를 상고해 보니 그 법에 감수(減數)에 미치지 못한 것은 일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중략).... 이로 본다면 오늘의 일식은 마땅한 것 같습니다. 외편과 《대명력(大明曆)》은 그때 아직 추산하지 않고 먼저 내편법만 추산하여 아뢴 것입니다.

 - 중종실록 중종 34년 9월 1일 을미 2번째 기사


 칠정산 내편으로 일식을 추보했을 때 일식이 아닐 것으로 보여 일식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그 외 칠정산 외편이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는 추산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직무 유기가 아니고 세종실록에 이유가 있다.


 예조에서 서운관(書雲觀)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금후(今後)에는 일·월식(日月食)에 내·외편법(內外篇法)과 수시(授時)·원사법(元史法)과 입성법(立成法)과 대명력(大明曆)으로 추산(推算)하는데...... 중국에서 추산(推算)한 것과 합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근년에는 그만두었사오니, 청하옵건대, 이제 내편(內篇)의 법으로 추산하여 전(前)과 같이 성책(成冊)해서 올리게 하소서."

 - 세종실록 세종 25년 7월 6일 기미 5번째 기사


 즉 수시력을 계승한 대명력이나 회회력을 참고한 칠정산외편은 오차가 심하고 칠정산내편으로 추산했을 때가 가장 정확하므로 앞으로 칠정산 내편으로만 추산하여 일식을 예측하자는 내용이다. 칠정산이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정확성을 높인 것에 대한 세종대왕과 당시 서운관의 자존심이 묻어 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칠정산 내편도 결국 오차가 생기기 시작하여 이를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하였고 세조 때 '교식추보법가령'을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이은희 등은 그의 논문 '조선 초 간행의 교식가령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012, 34, p.35-70)'에서 칠정산내편과 교식추보법가령의 계산법을 이용해 당시에 예로 들었던 정묘년(1447) 8월의 일월식의 시각을 계산해 본 결과 칠정산 내편과 교식추보법가령 조차도 한양보다는 북경을 기준으로 하는 실제 시각에 더 근접하다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어쨌거나 정밀하지 못한 당시 일식 계산으로 인해 일식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고 구름이 걷히지 않았다면 있었는지도 몰랐을 일식이 결국 관측된 바람에 이틀이 지나고도 저녁 석강 경연에서 중종은 신하들에게 미안해 해야만 했다.


 석강에 나아갔다. 이르기를,

"이번 일식의 변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초하루에 있었으니 반드시 일식일 텐데, 관상감 관원이 제대로 추산하지 못해서 지금 한창 다시 추산하는 중이다. 참으로 일식이었다면 서울과 지방의 구식(救蝕)을 하지 못했으니 매우 미안하다."

하니, 이귀령(李龜齡)이 아뢰었다.

"이는 반드시 일식일 텐데 잘못 추산한 것입니다. 일식은 땅 속으로 먹히었다가 다시 둥글어질 때에는 땅에서 나오는 것인데, 관상감 관원이 매우 태만했었기에 죄를 받은 자가 많습니다. 지금 추산하는 자들이 모두 용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같은 것입니다. 고금에 해가 이지러지는 변이 없었는데, 어찌 지금에만 이러하겠습니까. 일식임이 분명합니다."

 - 중종실록 중종 34년 9월 3일 정유 2번째 기사


 사실 현대에서는 재미있는 천문 이벤트에 불과한 일식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구식의 제사를 못했으니 중종은 미안해하고 이 사단의 책임이 '용렬'한 관상감 관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날 관상감 영사 윤은보, 제조 김안국 등이 말하기를,


 당초 해와 달의 추산관(推算官) 조헌조(趙憲祖)가 내편(內篇)을 가지고 추산(推算)할 때 처음에는 일식으로 그날을 추정했었으나, 법 중에 다 없어지지 않으면 일식이 아니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일식일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다시 추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헌조(趙憲祖)가 내편을 가지고 추산했더니 일식이 아니라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외편과 《대명력(大明曆)》이 있으니 이것을 모두 상고해서 준거를 삼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것을 추산하지 않고 일식이 아니라고 단정했으니,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됩니다. 신들도 제조(提調)로서 제대로 검사하여 살피지 못했으므로 대죄(待罪)합니다.

 - 중종실록 중종 34년 9월 3일 정유 2번째 기사


이귀령이 얘기한 '용렬'한 관상감 관원은 조헌조(趙憲祖)라는 사람으로 칠정산 내편만으로 추산하여 일식이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이런 사달이 났으니 조헌조를 죽여달라는 내용이다.

 당시 일관이라는 직업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지 못한 계산 장치로 잘못된 계산이 나왔을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이 사형이라니..

 중종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내가 처음 즉위해서 들으니 조종조(祖宗朝) 때는 일식을 이와 같이 잘못 헤아린 자는 사형으로 논단한다고 했지만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지는 알 수 없다조헌조가 내편(內篇)을 추산한 것이 이와 같지만 외편 및 《대명력(大明曆)》도 추산하는 것이 옳다. 또 김효신(金孝信)이 추산했다는 감수에 미치지 못하면 교종도를 더하여 감한다는 법을 헌조(憲祖)도 알지 못했을 리가 없으나 거기에 주의하여 추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죄로 논한다면 편치 못하니 금부가 추고하라. 제조는 스스로 추산할 줄 모르고 그 관원이 말하는 바를 따랐으므로 잘못은 아니니, 대죄하지 말라. 다시 추산할 때 김효신만이 제대로 이렇게 했고, 나머지 사람은 헌조를 구원하기 위하여 바른 말을 하려 하지 않았으니, 나머지 사람은 모두 형조가 추고하라"

 - 중종실록 중종 34년 9월 3일 정유 2번째 기사


 이전에 정말로 일관을 사형에 처했던 기록이 있는지 보고 다시 추산하여 일식을 맞춘 김효신만 제외하고 조헌조를 비호했던 관상감 관원은 모두 처벌하라는 내용이다.


 일식이 발생하는 시각의 오차가 있는 것은 이미 성종 때부터 있었다. 성종 4년에도 일식이 있을 것이라 하여 구식의 예를 취하고 있었는데 예고된 시각에 일식이 발생하지 않아 궐 안으로 들어왔다가 40여 분 후에 일식이 발생하여 이 때도 일관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성종이 죄주지 말라 한 적이 있다. (성종실록 성종 4년 4월 1일 신유 1번째 기사)

 하지만 이렇게 추산의 오차가 있음에 대하여 이후 어떻게 하였는가는 임금마다 다른 것 같다. 세조는 교식추보법가령이란 책을 편찬하였고 성종은 일관들에게 다시 역산을 상고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의 중종실록 조헌조에 대한 기사의 다음에 황당한 내용이 있는데,

 

 김안국이 《옥력통정경(玉曆通政經)》을 올리면서 아뢰었다.

"이것은 당(唐)나라 이순풍(李淳風)이 지은 것으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경상도 민가(民家)의 휴지 속에서 얻은 것으로 앞면은 이미 찢어지고 없어진 것이 많습니다. 다시 민간에서 구하여 없어진 곳을 보충해 가지고 항상 이것을 본다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하늘 변고의 조짐을 알아서 다함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도리를 닦을 것입니다. 근일 항상 실록청(實錄廳)에 나가서 실록을 보니, 조종조 때에는 매양 하늘의 변고가 있으면 위에서 《옥력통정경(玉曆通政經)》을 상고하라고 하였고 아래에서도 이와 같이 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이 반드시 내장(內藏)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니 찾아내어 다시 인쇄하여 상께도 바치고 관상감에도 간수하면 상하가 모두 상고하여 보고 다함께 닦을 수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중종실록 중종 34년 9월 3일 정유 2번째 기사


 현재 칠정산내편이 잘 맞지 않았으니 대신에 참고하자는 책이 원나라도 아니고 송나라도 아니고, 무려 당나라의 이순풍이 지었다는 '옥력통정경'이라는 책이다. 1539년 기준으로 900년 전 사람이 지은 책을

기준잡자는 내용에 이후 내용을 보면 중종도 흔쾌히 동의한다. 더 황당한 것은 옥력통정경이 민간에 유포되면 백성들이 재변을 알아 폐단이 있을 것이라며 모두 회수해 관상감에서 관리하자는 내용이다.

 저명한 성리학자였던 김안국이 심지어 백성들이 알면 안 되니 책을 모두 없애자는 '금서(禁書)'의 지시까지 바란 것이다. 사림, 선비라는 자들의 폐쇄성과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나저나 이후 조헌조에 관한 언급은 실록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용렬'한 일관 조헌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1539년 음력 9월의 일식 사건이 있고 다음 해인 1540년은 식년시, 즉 3년마다 치르는 과거 시험이 거행되었다.

 아래는 관상감 관원의 조직도이다.

(이기원, '조선시대 관상감의 직제 및 시험 제도에 관한 연구 : 천문학 부서를 중심으로', 한국지구과학회지, 2008, vol.29, no.1, pp. 98-115)


 이 중 관상감 관원이 종 6품(주부) 이상의 관직으로 승진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과거 시험이 음양과(陰陽科) 시험이었다. 이 음양과 시험은 식년시 바로 전 해에 초시라는 1차 시험을 치른 후 당 해 봄에 2차 시험인 복시를 치러서 최종 합격 인원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다음은 음양과 시험의 합격자 명단이 있는 잡과방목이란 책에 기록되어 있는 1540년 식년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용렬'하다고 욕을 먹었던 일관 조헌조가 당당히 1등을 차지하였다! 이 잡과방목은 단순히 합격자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합격자의 자(字), 본관, 거주지, 직업과 합격자의 부친(또는 조부까지)의 이름과 직위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조헌조의 직업은 무엇일까?

 무려 '학생'이다. 말이 학생이지 정확히는 '무직'인 셈이다. 결국 한 해 전 있었던 일식 사건으로 인해

조헌조는 책임을 지고 관직이 삭탈되었던 것이다. 관상감이란 기관이 가졌던 최대의 임무인 일식과 월식을 추보하는 임무를 가졌던 조헌조는 눈물을 머금고 퇴장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조헌조는 조흥조(趙興祖)라는 형이 있었고 조흥조 또한 이 해 식년시의 합격자 명단에 3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의 전력을 조회해 보면 아래와 같다.

 조흥조는 음양과를 치르기 전까지 종 7품의 직장이었다.

 관상감의 관원은 7세-20세의 학생들이 천거에 의해 생도로 들어오게 되는데 음양과 시험에 입격을 거치지 않은 이들 중 가장 높게 오를 수 있는 관직이 바로 종 7품의 직장이었다. 종 6품의 주부 이상의 관직은 반드시 음양과 시험에 합격되야만 했었다. (박권수, '조선 후기 관상감(觀象監) 입속자(入屬者) 연구', 한국사연구, 2019, vol., no.187, pp. 289-324)

 조흥조의 품계가 종 7품의 직장이었다면 잘리기 전 조헌조 또한 직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합격자 명단에서 조헌조가 조흥조보다 앞선 결과를 보면 조헌조의 실력이 더 좋았다는 것이고, 구식례라는  제사를 준비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일, 월식의 추보 계산을 아무에게나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9월의 실록에서, 일식 사건에 대하여 조헌조의 책임에 관해 의논하는 기록 중 중종이 "헌조도 알지 못했을 리가 없으나..."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보통 실록에서 임금과 신하가 번갈아 대화하는 내용을 적을 때 사관도 귀찮은 지 처음에 신하의 이름을 다 쓰지만 그다음부터는 성을 빼고 이름을 넣기도 한다. 예컨대 "신숙주가 답했다...... 숙주가 다시 답하기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중종이 조헌조를 '헌조'라고 부른 것이 단순히 사관이 귀찮아서 이름만 적은 것인지 그저 아랫사람이기에 이름만 부른 것인지, 아니면 중종이 조헌조를 잘 알기에 친근하게 부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건이 있기 전에도 이미 중종은 조헌조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조헌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조헌조, 조흥조 형제의 부친은 중종 시절 대사헌과 의정부 좌참찬까지 지낸 청백리 조원기(趙元紀)이다. 

조원기는 연산군 시기 관직을 시작했다가 사관으로 재직 중 사초(史草)를 보고자 하는 연산군에게 이를 거절하여 파직된 적이 있는 대쪽 같은 인물이다 갑자사화에도 연루되어 유배당했다가 중종반정 후 복직되어 좌참찬까지 올랐는데 1533년 조원기가 사망할 때 중종은 슬퍼하며 이틀 동안 조회를 열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조원기의 조카, 즉 조흥조, 조헌조의 사촌 형이 중종의 애증의 신하였던 '조광조'이다.

 조광조의 사촌이자 조원기의 아들들을 중종이 모를 수가 있을까?

 조흥조, 헌조 형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조원기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 무려 '홍언필'이다. 즉, 영의정 홍언필에게 조원기는 외삼촌이고, 홍언필과 그 아들 영의정 홍섬과도 친척인 셈이다.

조원기의 신도비문을 조흥조의 요청으로 홍언필이 지었는데 여기에 조원기의 서자인 조흥조와 조헌조가 언급되어 있다.

조원기 신도비문 중 발췌

 한양 조씨 대종회 인터넷 족보에서 조흥조와 조헌조의 자손은 나오지 않는다. 패관잡기에서는 조흥조, 조헌조 형제가 부친이 돌아가시고 함께 살고 분가하려 하지 않으니 당시에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 두 형제는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묵재 이문건과도 교류가 있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약을 먹었다. 밥을 먹은 후에 출발해서 산소로 돌아가자 노원(盧原) 사람 막산(莫山)이 이부자리 등을 실어왔다. 노 양차(梁且)가 배행해서 왔다가 저물녘에 바로 서울로 돌아갔다.

저물녘에 조흥조(趙興祖) 형제가 보러 와서 흥조의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

 - 묵재일기 1536년 10월 19일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안타깝게도 조흥조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뜬 것 같다. 홍언필이 지은 신도비문을 이문건에게 보여줬는데 이문건이 비문이 아주 좋다며 칭찬하는 내용도 있다. 이들의 교류는 이문건이 을사사화로 인해 성주로 유배된 뒤에도 있었던 듯하다.


조흥조(趙興祖)‧헌조(憲祖) 등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 백력(白曆) 달력의 종류 2개를 보냈으니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답장을 써서 주어 보냈다. 

 - 묵재일기 1546년 12월 1일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1546년이면 두 형제가 음양과에 합격한 이후이므로 관상감에서도 상당히 고위직에 있었을 것이다. 실각 후 멀리 귀양을 간 이에게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흥조와 조헌조 형제가 역사에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이 정도까지이다.

 그런데 3년 후인 1543년 식년시에 홍언필의 아들 홍원이, 20여 년 후인 명종 19년(1564)과 선조 원년(1567) 식년시에 홍언필의 손자이자 홍섬의 아들인 홍기년, 홍기수, 홍기향이 음양과에 합격한 것은..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명종 5년인 1550년 7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오는 8월 초하룻날 일식(日蝕)이 있는데, 내외편(內外篇) 과 《대명력(大明曆)》의 세 가지에 모두 ‘지하에서 일식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편의 회회법(回回法) 에는 ‘복원(復圓)은 묘시(卯時) 초2각(初二刻)이고, 일출은 묘시 정3각(正三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간격이 단지 1각 밖에 안 됩니다. 만약 복원 전에 해가 뜨거나 복원하고 일출했을 때 그 색깔이 이상하다면 이는 예사로운 변이 아닙니다. 미리 일식을 구제하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가 이러한 변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식 구제하는 조치의 승전을 받들고자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 명종실록 명종 5년 7월 6일 2번째 기사


 이 내용은 필시 1539년 일식 사건의 학습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관상감'이라고 하였지만 왠지 올린 이는 100% 조헌조일 것 같다. 칠정산 내편, 외편, 대명력, 회회법으로 다 계산했을 때 일출 전에 일식이 끝난다고 하지만 혹시 일출 뒤에 일식이 생기면 큰일이므로 미리 준비는 해야 한다고 아뢴 것이다.

 이때 발생한 일식은 어땠을까.

1550년 9월 10일 일식도 (Eclipsewise.com)

 예상대로 일식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달의 그림자가 비껴간 것이 하마터면 1539년의 사건이 재발할 뻔한 일식이었다. 다행히 일식 당일에는 기상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일식이 있는 날인데 짙은 구름이 끼어 보이지 않았다. 壬戌朔/日當食, 密雲不見。

 - 명종실록 명종 5년 8월 1일 1번째 기사


한 번 잘려 본 경험도 있었기에 조헌조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날이었을 것이다. 이 번의 계산은 역시 그답게 정확하였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계산을 확실히 증명하고 잘못될 것까지 대비하여 조심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경험만 한 스승'은 없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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