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일식 기록들은 다양한 형태로 쓰여 있다. 일식이 일어난 시각을 년월 및 회삭간지로 표현하고, 간단히 일식(日食(蝕)), 일유식지(日有食之)라고 표현하였는데, 좀 더 자세히 표현한 경우에는 개기일식이었음을 표현하기 위해 일식, 일유식지 뒤에 기(旣(既))자를 쓰기도 하고, 일식이 발생했을 때 서로 겹치는 태양과 달의 위치를 근처 별자리의 수거성과 떨어진 정도로 쓰기도 했다. 때로는 일식이 시작하는 시각(초휴), 가장 많이 가려진 시각(식심), 일식이 끝나는 시각(복원)까지 쓰기도 했다.
모양을 표현하는 경우 개기일식에 가까웠지만 완전히 가려지지 않은 경우 기진(幾盡), 즉 '거의 다 가렸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좀 더 자세한 표현으로 드물게 부진여구(不盡如鉤), 즉 '다하지 아니하여 갈고리 같았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오늘은 이 '부진여구'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자세히 다뤄보려 한다.
해가 다 가려지지 않는 대표적인 일식이 금환일식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아 달의 겉보기 크기도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태양의 지름보다 작은 경우 비록 달과 태양이 정확하게 겹쳤다 해도 태양의 주변 부분이 밝게 보여 우리가 개기일식 때 보게 되는 '코로나' 현상이나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져 별이 보이는 현상까지는 발생하지 않는다.
위 그림에서처럼 금환일식은 달이 태양의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왔을 때 반지 모양으로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반지 모양을 보게 되는 경우는 수 분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초승달 모양이나 갈고리 모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 달의 본그림자가 지나가는 영역에서도 이런데 본그림자에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영역에서는 달이 가장 많이 태양을 가려도 '갈고리 모양'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부진여구'라는 기록을 남긴 대부분의 일식들이,기록된 사서에 해당되는 나라의 수도를 관측지로 보았을 때 이와 같았다.
다음은 '부진여구'라고 기록된 적이 있는 일식들이다.
1. 기원전 89년 9월 29일 (한서 오행지)
征和四年八月辛酉晦,日有食之,不盡如鉤,在亢二度。晡時食從西北,日下晡時復。
아래 그림은 당시 한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보였던 일식의 경과 그림이다.
달이 완전히 태양을 가리지 못하고 아래로 치우쳐 지나가 가장 많이 가린 순간의 태양의 모습이 갈고리 같았음이 확인된다.
2. 기원전 34년? (한서 오행지)
建昭五年六月壬申晦,日有食之,不盡如鉤,因入。
이 일식은 삼국사기에도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지만 실제로 기원전 34년 전후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관측 가능한 일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추측들이 있으나 왜 이렇게 기재되어 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이 때는 한나라 성제 시절로 역시 수도 장안에서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일식으로 인해 성제의 아내였던 허황후가 곤욕을 치르는데 이 이야기는 가까운 기회에 다뤄보고자 한다.
4. 기원전 2년 2월 5일 (한서 오행지)
哀帝元壽元年正月辛丑朔,日有食之,不盡如鉤,在營室十度,與惠帝七年同月日。
전한 마지막 황제인 애제 시절 벌어진 일식이다.
5. 360년 8월 28일 (송서 오행지)
升平四年 八月 辛丑朔 日有蝕之 不盡如鉤
이때 송나라는 남북조시대 유송을 말한다. 당시 유송의 수도는 건강으로 지금의 난징이다.
이 날의 일식은 수도인 난징에서 달이 태양의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오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었다. 달의 본그림자가 지나가는 영역의 최외각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보이게 되는 현상이다.
6. 429년 12월 12일 (송서 오행지, 북위 본기)
(송서) 元嘉 六年 十一月己丑朔,又日有蝕之,不盡如鉤,蝕時星見,晡方沒, 河北地暗
이 때는 개기일식으로 달의 본그림자가 중국 대륙을 지나갔는데 난징보다 살짝 북쪽으로 지나갔다. 그래서 태양의 위쪽 부분을 달이 가리면서 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서는 위와 거의 비슷하지만 '부진여구' 다음 기록이 약간 차이가 있다.
己丑朔,日有食之,不盡如鉤,星晝見,至晡方沒,河北地暗。
남북조에서 남조인 유송에 정통성을 두는 자치통감 특성상 송서에 기반하여 기록하였고,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북위의 사서인 위서에는 일식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어 또 다른 자료를 기반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북위의 수도였던 평성, 즉 지금의 다퉁 지역 또한 달의 본그림자가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다.
달의 본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수도가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위에서도 기록이 존재했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부진여구'라는 표현을 썼을 것 같다.
7. 547년 2월 6일 (자치통감 양기(梁紀))
高祖武皇帝十六太清元年 春,正月朔,日有食之,不盡如鉤。
남조의 송-제-양을 있는 남량 시기의 일식이다. 이때 수도인 난징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부진여구' 기록의 일식보다는 식분이 낮은 부분일식이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슬아슬하게 개기일식이 아닌 일식뿐만 아니라 비교적 높은 식분의 부분일식일 때도 '부진여구' 기록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8. 729년 (구당서 현종본기)
開元十七年 冬十月戊午朔,日有蝕之,不盡如鉤。癸未,睦州獻竹實。庚申,前太子賓客元行沖卒。
당나라 현종 시기의 일식 기록이다.
지금까지 '부진여구'라 기록되어 있는 모든 일식들이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 금환일식 내지는 높은 식분의 부분일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부진여구'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있다. 1445년, 세종 27년 음력 4월 1일의 기록이다.
'甲辰朔/日食不盡如鉤。' - 일식을 하였는데, 다하지 아니하여 갈고리[鉤]와 같았다.
당시 세종은 잦은 질병으로 인해 경복궁에 있지 않고 이어소(移御所)를 차려 기거하였는데, 이때 세종은 현재 서울 마포구 한강변에 있는 망원정에서 기거하였다. 아래 그림은 1445년 5월 7일의 일식의 본그림자의 궤적을 그린 일식도이다.
일식의 본그림자의 외곽 끝에 서울의 강북지역이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망원정의 위치 좌표와 일식 데이터는 아래와 같다.
위 그림에 쓰여 있는 것처럼 금환이 보이는 시간은 3분가량이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금환일식이 보였던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약 3분간은 금환일식이었던 일식이었지만 '갈고리와 같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을 수 있다. 앞서 360년의 일식 기록과 마찬가지로 금환일식이었지만 관측지가 본그림자의 외곽으로 치우쳐 있어 현대처럼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아닌 육안으로 관측에 임했을 일관들이 '금환'으로 보이는 것을 놓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을 가지고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유사역사가들이 있는데, 일식이 금환일식이었기 때문에 갈고리 모양으로 보이려면 당시 수도인 한양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어딘가에 위치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앞서도 너무 앞섰는데, 그렇게 부분일식이 보일 수 있으려면 대륙까지 안 가도 된다. 서울과 가까운 개성에서의 일식의 모습을 보자.
대륙까지 안 나가고 파주나 개성 정도까지만 가도 일식의 모습을 갈고리 모양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당시 한반도의 절반이 넘는 지역을 일식의 본그림자가 지나갔기 때문에 각 고을의 관아에서 '기진', '부진여구'라는 서신이 모였을 것이다. '금환일식'은 현대에 와서 일식을 분류하는 용어이고, 개기일식(旣)이 아닌 이상 기진, 또는 부진여구라 표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저 실측에 의한 기록임을 입증하기엔 더 없이 좋은 자료인 정도로 이해해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