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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Dec 13. 2023

묘청의 난에 척준경은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서로 다른 천명(天命)을 따른 두 사람

 고려사에서 묘청이라는 인물은 마치 한무제를 현혹했던 이소군, 소옹, 난대등의 방사(方士)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이 등장했던 시기의 해당 군주들의 나이도 비슷한데 이소군이 등장했을 때 한무제는 23세였고 묘청이 등장한 1127년 고려 인종은 18세에 불과한 나이였다. 어린 나이의 군주를 현혹하여 득세를 하였다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묘청

 알려진 것처럼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사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추켜 세우며 만약 서경천도를 주장하던 이들이 승리했다면 '자주적, 독립적, 진취적'인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갔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채호의 말처럼 이루어졌다 해도 불과 150년 뒤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문명들이 몽고족의 말발굽에 짓밟혀 버렸고, 고려가 망하고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유교 사상인 성리학이 자리 잡은 조선이 개국한 역사의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저 도참과 천문, 풍수지리를 이용해 군주를 현혹해 득세했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서경(평양)에서 거병하고는 자멸해 버린 사이비 승려의 일대기일 뿐이다. 묘청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고려 인종 시대 하면 빠질 수 없는 이자겸과 척준경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무쌍의 척준경은 왜 한 순간에 실각했을까.


 이자겸의 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사건이기에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12세기 초 당시 고려는 문벌귀족이 세상을 호령하던 시기였고 그중 경원 이 씨의 이자겸이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이었다. 이 이자겸은 인종이 14세로 왕위에 오른 1123년 자신의 두 딸을 인종의 황후로 시집보내어 인종의 장인이 되어 고려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이자겸이 득세한 시기에 인종의 측근이었던 김찬 등이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척준경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척준경은 두말할 것 없이 윤관의 여진정벌 당시 전쟁 영웅으로 서해도 곡산의 가난한 향리의 아들에서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문벌귀족도 아니고 무관 출신이라 멸시받던 것에 분개하여 고향으로 낙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후 이자겸과 사돈을 맺으면서 경원 이 씨의 문벌귀족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생기자 이를 기회로 여긴 인종이 척준경을 포섭하였고 결국 척준경에 의해 이자겸이 제거되면서 이자겸의 난은 끝을 맺게 된다. 이때가 1126년 음력 5월의 일로 이때부터 척준경은 고려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127년 음력 3월 척준경은 갑자기 실각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정언(正言)으로 있던 정지상의 탄핵 상소에 의해 암타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간 것이다. 탄핵 상소의 내용인즉슨, 비록 1126년 5월에 이자겸을 제거한 공이 있지만 석 달 전인 음력 2월 궁궐을 불태우고 인종에게 활을 쏜 것은 씻을 수 없는 대죄라는 것이다. 척준경이 정치 감각이 없는 무관 출신이라고 쳐도 당시 일인지하였던 척준경이 고작 상소문 한 장에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 유배를 당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묘청의 등장


 바로 이 시점에 처음으로 묘청이 등장하게 된다. 척준경이 암타도로 유배를 가던 날이 1127년 음력 3월 25인데, 그보다 열흘 전인 음력 3월 14일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경의 요망한 승려 묘청(妙淸)과 일관(日官)인 백수한(白壽翰)이 왕을 설득해 상안전(常安殿)에서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열었다.'

- 고려사, 인종 5년 1127년 3월 갑진일


 이때 인종은 개경의 궁궐이 불탔기도 하지만, 이자겸, 척준경의 난과 개경 문벌 귀족에 염증을 느껴 서경으로 자주 행차하곤 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서경 출신의 인물들과 교류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정지상, 일관 백수한, 김안(이자겸의 난 때 김찬)등이었다. 이때 일관 백수한이 본인의 스승이라며 끌어들인 인물이 바로 묘청이다. 백수한은 고려사에서 단순히 직업을 '일관(日官)'이라고 하나 정치 일면에서 인종에게 간언을 하는 것만 보아도 오윤부처럼 '지태사국사'이상의 고관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변을 보고하는 중임을 가진 일관인 백수한과 백수한이 스승이라 여겼던 묘청이 있었으니 18세의 어린 인종을 현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척준경이 실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들이 천변을 이용해 척준경에게 역심(逆心)이 있다며 인종에게 모함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천동상위고에서 이미 이를 뒷받침하는 고려사 천문지의 내용을 해석하고 있다.


'인종 5년 정미년 (1127년),


'정월 경술일. 목성이 태미원의 좌액(左掖)으로 들어갔다. 토성이 태미원 동번의 상상을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대신이 임금의 명(命)을 제멋대로 부리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힘센 신하가 권력을 손에 넣으리라.”라고 하였다.


'2월 무진일. 목성이 태미원의 좌집법을 침범하였다. 5월 을미일. 달이 태미원의 내병(內屛)을 침범하였다.

...... 점사에 이르기를 “대신이 임금의 명(命)을 제멋대로 부리리라.”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이자겸(李資謙)은 비록 주벌되었으나 간신배가 권력을 손에 넣었고 가뭄이 들고 황해(蝗害)가 잇달았다. 그리하여 거듭 통석(痛惜)의 교지(敎旨)를 내렸다.'

- 천동상위고, 한국고전종합 DB


 목성과 달이 임금이 거처하는 곳인 태미원을 들락날락했다는 기록이다. 좌집법, 좌액 등은 태미원의 왼쪽 담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점친 기록들은 대부분 신하가 임금을 제멋대로 부리고 병란이나 재해가 있을 것이란 내용뿐이다. 이자겸을 주벌하고 권력을 손에 넣은 간신은 당연히 척준경을 말한다. 그리고 묘청이 등장한 음력 3월에는 아래와 같이 목성과 토성이 동시에 역행하여 태미원에 침입하였다.

1127년 목성과 토성의 태미원 동시 역입(逆入)

 황도를 따라 운행하는 행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역행하여 머무르는 경우는 항상 좋지 않은 일로 여겨 왔다. 그런데 목성과 토성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역행하여 태미원의 왼쪽 담장을 넘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천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임금이 사는 궁궐의 담장을 두 행성이 부수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묘청과 백수한, 정지상은 바로 이 타이밍을 노려 척준경의 탄핵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위 동영상에서 목성과 토성이 다시 순행을 시작하며 태미원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날은 거짓말 같게도 척준경이 암타도로 유배 가는 음력 3월 25일과 동일하다. 척준경이 사라지자마자 요술같이 행성들이 정상적으로 운행하는 모습을 본 18세의 인종이 묘청 등을 어떻게 보게 되었을지는 자명하다.

 12세기까지는 이렇게 점복(占卜)이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정치적 명분은 결국 여론이 되고 국왕의 힘이 되는 것이다. 위의 천문 현상이 명분이 되어 결국 척준경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듬해 척준경은 그래도 이자겸을 숙청한 공이 있다 여겨, 유배지였던 암타도에서 고향인 곡주(곡산)로 돌아오게 된다. 곡주는 서해도로 수도인 개경과 멀지 않은 곳이고, 1130년 경에는 직전(職田)까지 돌려받아 말이 유배이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것과 같은 셈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은 서경의 세력에게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묘청과 정지상이 여러 번 주작(?)을 한 것이 들통나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1135년 정월 마침내 묘청의 난이 일어나고 만다.

 그런데 1135년 정월 당시, 이때가 묘청이 확실하게 거병을 할 것으로 약속한 날이었는지에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서경 천도 세력의 주축인 백수한이나 정지상이 개경에 있다가 반란 사실을 알게 된 김부식에게 신속하게 척살당하였기 때문이다.


'초하루 을사일. 일식이 있었으나 먹구름에 가려 관측할 수가 없었다.

무신일(4일). 묘청(妙淸)과 유참(柳旵)·조광(趙匡) 등이 서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신해일(7일). 김부식을 원수(元帥)로 삼아 서경의 반군을 토벌하게 했다.

갑인일(10일). 김안(金安)·정지상(鄭知常)·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 인종 13년(1135) 을묘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당시에 일식이 있었는데 개경에서는 먹구름으로 인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흘 뒤인 묘청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고 정지상과 백수한은 무려 6일을 개경에 있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서경에 있던 반란 세력과 이에 동조해야 할 개경에 있던 인물들 사이에 아귀가 맞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일식의 경로는 어땠을까. 아래 동영상을 보자.

1135년 일식 경로

 당시 금환일식의 본그림자의 경로가 드라마틱하게도 서경(평양)은 지나가는 데 반해 개경(개성)은 지나가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아무 기록도 없지만 만약 서경에서는 날씨가 괜찮아 해가 완전히 가려지는 금환일식을 보았다고 가정한다면, 묘청이 이것을 서경 천도라는 자신들의 거사에 대한 천명(天命)으로 삼고 예정과는 달리 일찍 반란을 도모했을 수도 있다. 개경에 있는 정지상, 백수한 등과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말이다. 그 증거로 고려사 열전 묘청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때 서경에 있던 백수한(白壽翰)의 친구가 편지를 보내, “서경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리로 탈출해오라.”라고 그를 불렀다. 백수한의 아들 백청(白淸)이 편지를 지니고 와 아비에게 주자 백수한이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 묘청 [妙淸]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당연히 개경에 있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 서경으로 도망 오라는 편지를 백수한은 반대로 임금에게 갖다 준 것이다.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것을 보면 묘청이 주도한 서경에서의 반란이 개경에 있던 서경 천도 세력과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 정지상, 김안(과거 김찬), 백수한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훼방을 놓다가 토벌의 임무를 부여받은 김부식에게 척살당하고 말았다.

묘청의 세력범위와 관군의 토벌 진로

 위 그림은 묘청의 난 당시 묘청의 세력 범위와 관군의 서경 포위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관군의 수장이었던 김부식은 군을 서경을 바로 공략하기보다는, 군을 좌, 중, 우군으로 나누어 주변 지역을 우선 토벌하여 안정시킨 뒤 사방을 완전히 포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림의 묘청의 세력 범위는 밑으로 남하하다가 서해도 곡주(곡산)에서 멈추고 만다. 이 당시 곡주에는 불과 8년 전 낙향한 척준경과 그의 일족이 버티고 있었다. 관군의 토벌 경로도 곡주를 버팀목 삼아 그 앞으로 지나가며 성주, 안주 등을 공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척준경의 곡주 세력이 서경 반란 세력의 편을 들어 관군을 요격했다면 불가능했을 진군 경로이다.

 서경에서 척준경은 어떤 존재였을까. 척준경이 가장 전성기일 때 가졌던 수많은 직함 중 서경유수(西京留守)가 있다. 그는 개경 다음의 고려 2번째 도시인 서경의 실권자였던 것이다. 또한 곡주는 직선거리에는 벗어나 있으나 개경과 서경 사이에 놓여 있어 이 지역의 선택에 따라 전세(戰勢)가 판가름 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비록 직함은 없었어도 불과 8년 전까지 권력자이자 전쟁영웅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기대할 수 없었을까.

 재미있게도 일식 경로를 보면 달의 본그림자가 평양과 같이 곡산에도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척준경은 묘청과는 다른 천명을 선택하였다. 묘청의 세력이 아닌 관군의 편을 든 것이다. 이는 척준경이 있는 곡산에서도 먹구름이 끼어 일식을 보지 못하여 생긴 일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도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은 척준경을 탄핵한 장본인들이었기에 당연히 척준경이 그들과 일을 함께 할 리 없었고, 오히려 척준경은 이들을 토벌함으로써 인종에게 다시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비록 이렇게 묘청의 난 당시, 척준경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묘청의 반란 세력은 그가 있던 곡주 아래로 진출하지 못하고 토벌되고 만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144년에 검교호부상서의 관직을 받고 다시 돌아왔던 것을 보면 묘청의 난 당시 척준경이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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