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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Oct 28. 2022

조선일관 성담기

연산군과 성준, 성현의 월식론, 그리고 성담기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부터 출발하여 사육신 성삼문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기의 역사와 함께한 가문으로 창녕 성씨 가문이 있다. 이 중에는 생육신 중 한 명인 성담수의 서얼 동생으로 관상감의 일관으로 재직하면서

창녕 성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사람으로 성담기(成聃紀)라는 분이 있다.

 과거 기록물에 성담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운과방목의 음양과 급제자 명단이다. 자료는 한국 역대 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식년시 급제자 중 성종 2년 음양과에 혼자 '1등'으로 기록된 성담기를 볼 수 있다. 운과방목에는 급제한 사람이 급제 전 가졌던 직함과, 부친, 조부의 이름과 직함을 기재함으로써 신원을 확인하였다.

출처 : 한국 역대 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성담기의 출생 연도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사망한 해는 1537년으로 확인이 되는데  근거는 다름 아닌 중종실록이다.


'.. 황득정과 성담기는 다 신장(訊杖)에 죽었으니...'

- 중종 32년 6월 10일 정사 1번째 기사


 신장은 추국을 할 때 고신을 하기 위해 때리는 곤장을 말한다. 성담기가 이렇게 곤욕을 치른 이유는 유명한 희릉 사건 때문이다. 인종의 어머니이기도 한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을 처음에는 헌릉 근처에 조성하였는데 조성 당시 묘터에 큰 돌이 나와 불길하였음에도 이를 숨기고 조성하였다 하여 능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 옮기고 당시 조성을 담당했던 이들이 벌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 성담기는 능을 조성할 땅을 알아보는 상지관에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김안로가 희릉 담당 총책임자였던 정광필을 모함하기 위해 벌인 사건으로 김안로가 실각한 후 오히려 모함에 가담했던 이들이 지탄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묵재 이문건(李文楗)이 있다.

 아무튼 중종실록을 보면 1537년에 성담기를 포함한 상지관들이 80세를 넘겼다는 말이 나온다. 당시 영의정 정광필이 1462년생으로 76세였으므로 성담기는 늦어도 1458년 이전 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성담기가 위치한 창녕성씨의 가계도이다.

 성담기는 생육신인 성담수의 서얼 동생이고 성담수 형제들은 성삼문과 6촌 지간인데, 이들 모두 개국 공신 성석용의 후손으로 성석용의 호인 회곡(檜谷)공파이다. 성담수를 포함한 7형제는 생몰년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헌을 토대로 했을 때 장남인 성담수는 1437년생, 4남인 성담령은 1452년 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성담기의 출생 연도는 1452년에서 1458년 사이일 것이다.

 육촌 형인 성삼문과 그 일가가 처형되었던 1456년 전후에 태어났던 것이다. 단종 복위 운동에 실패한 성승-성삼문 일가와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부친이었던 성희도 연좌되어 끌려가 유배형에 보내졌고 3년 만에 돌아왔으나 화병으로 인해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관직의 뜻을 접은 장남 성담수는 생육신이 되었고 차남인 성담년이 147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얻은 것 빼고는 나머지 형제는 은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중에 성담기는 1471년에 음양과 식년시에 1등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미 그전부터 삼력관으로 관상감의 일원이었다.

 창녕 성씨 가계도에서 성담기가 포함된 9세손을 중심으로 한 인맥을 확대하여 보았다.

 사육신 성삼문과 같은 항렬의 먼 친족으로 성준(成俊)과 성현(成俔)이 있다. 조선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 있다면 갑자사화가 일어날 당시 영의정이었던 성준, 그리고 악학궤범과 용재총화라는 명저를 남긴 성현을 모를 수가 없다.

 성준은 24세이던 세조 5년(1459년) 식년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성현은 23세이던 세조 8년(1462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두 사람 모두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10대의 어린 나이에 같은 항렬의 먼 친척 중 큰 형이라 볼 수 있는 성삼문과 그 일가가 멸문의 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들이 관직에 있던 시대는 세조-예종-성종-연산군의 시대로 사대부들 간의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과 그로 인해 촉발된 사화가 있던 시기였다. 그중 갑자사화로 가장 큰 화를 입었던 사람이 영의정 성준이었고 성현은 갑자사화 이전 사망했으나 부관참시되었다.

 성담기가 음양과에 1등으로 급제했던 1471년에 성준(36)은 사간원(司諫院)의 최고위직인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성현(33)은 경연 검토관이었다가 명나라에 다녀온 후 3년 뒤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된다.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하며 왕의 인사, 업무 등을 비판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던 기구인 삼사(三司)의 요직에 앉게 된 것이다.

 중중 시대에는 사림이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이 신봉하던 주자학적 재이관, 즉 천인감응론에 의거하여 갖은 천변이나 기상현상을 임금님 탓으로 이용하였다. 성종 시기가 이러한 성리학적 재이관이 뚜렷하게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로 당연히 관상감과 삼사는 긴밀한 관계에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성준, 성현이 삼사의 요직에 앉게 된 같은 시기에 같은 가문의 같은 항렬인 성담기 또한 음양과에 급제하여 관상감의 실무직에 앉게 된 것이다. 일관 성담기가 실록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곳은 중종실록뿐이지만 성준, 성현 이 두 명의 명재상과 시대를 같이하면서 관상감 관원으로서 그들의 지원군으로 활약했을 것임은 확실하다.

 그럼 이제 시간을 돌려 성담기도 20여 년 차의 베테랑 관원이 되고 성준, 성현 모두 당상관으로 있던 연산군 시기로 가보자.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이 오를 때까지 그 이전의 역대 왕들을 보면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만이 제대로 된 적장자로 정식으로 세자(또는 세손)로 책봉되어 동궁에서 교육을 받은 후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문종, 단종, 예종은 인종과 함께 조선왕조에서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가진 그룹에 속해 있다. 즉, 연산군 이전까지 군주가 될 수양을 동궁에서 쌓은 후 군주의 자리에 올라 뜻을 펼친 임금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연산군은 그때까지 조선 임금 중 정통성 하나는 제대로 가진 인물이었다. 단 하나, 세조의 증손자라는 것을 빼고 말이다.

 여기서 이전 군주들과 가질 수 있는 큰 차이가 있는데 다른 조선 임금들은 조선의 사대부 그룹에 속해 있다가 왕위에 올랐지만 연산군은 사대부 출신이 아닌 처음부터 왕이 될 위치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사대부들과 성리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들처럼 마냥 존경이나 신봉의 시선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인 성종이 경연 때마다 온갖 재난과 이변이 당신 탓이라는 신하들의 공격에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면서 고까운 시선으로 사대부들을 보았을 수 있다.

 특히 관학파와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지식 노하우가 결집된 곳이 궁궐이었으므로 다른 지식들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성리학에서 터부시 하는 것들을 누구보다도 쉽게 접하며 폐쇄적인 성리학에 대해 회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연산군이 무오,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흥청망청 지내다가 반정으로 물러난 얘기는 다 아는 사실이니 여기서는 사대부들과 연산군이 자존심을 걸었던 한 가지 싸움에 대해 알아볼 까 한다. 바로 월식을 대표로 하는 재이관에 대한 그들의 싸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월식 기록 중 '월당식불식(月當食不食)', 즉 월식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생기지 않은 기록이 있다. 일식과 달리 월식의 경우 관측할 수 있는 시간, 즉 경도상의 위치만 맞다면 위도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월식 관측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월식을 할 것이라 예측해도 관측할 수 없는 경우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월식이 발생하는 시간에 달이 떠 있지 않은 지하 월식인 경우

2. 반영 월식인 경우

 반영 월식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 중 본그림자가 아닌 반그림자를 통과하는 월식을 말한다.

출처 : 한경닷컴
출처 : 연합뉴스

 위 그림처럼 반영월식은 비록 월식이라 해도 달이 가려지지 않고 평소보다 어둡게 나타날 뿐이라 육안으로는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맑은 날이 아닌 흐릿하게 구름이 낀 날에도 반영월식과 같은 효과로

달이 어둡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월식은 월식이지만 식분이 0이기 때문에  과거 어느 시점부터 반영월식을 월식으로 인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월식을 예측하였으나 반영월식이기 때문에 '월당식불식'이라고 기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연산군일기에 일어났다.


Round 1.


'연산 3년 6월 15일 을유 1번째 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월식이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이 날은 개기월식으로 실제 월식을 볼 수 있던 날이다. 대간은 이때 월식을 불길한 징조로 보고 이것을 바탕으로 임사홍을 가자(加資, 승진)하는 것을 문제 삼는 상소를 올린다.


'연산 3년 6월 25일 을미 1번째 기사 

 ... 신 등이 듣건대, 4월에 우박이 내리고, 5월에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하늘을 가로지르며, 6월에는 보름에 일식·월식이 겹쳐 하늘의 재변이 일어나지 않는 달이 없으니, 이것은 하늘이 전하를 인자하게 사랑하여, 먼저 천재와 사변을 내리어 경각시켜 조심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일식, 월식을 막론하고 하늘의 변고 특히 식(食)이 있는 것은 불길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보았을 때 황당하다고 할 수준의 이러한 사고는 주자학을 신봉한 성리학자들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 사고에 대회 회의적이었고, '월식과 인사(人事)가 무슨 상관'이냐는 현대인과 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성종 때부터 이러한 재이(災異)에 대하여 경계하고 신하들에게 해결 방법을 구하는 구언(求言)이 관행화되어, 이를 좇지 않는 연산군에겐 타격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Round 2.


연산 4년인 1498년. 또다시 월식이 발생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연산 4년 윤 11월 15일 병자 2번째 기사

 왕이 전곶(箭串)에서 사열식을 친히 받으려 하매,  한치형·성준·정문형이 아뢰기를, "내일 월식(月食)이 있사오니, 마땅히 공구 수성하여 천변(天變)에 응하셔야 하옵는데, 전하께서 거가(車駕)를 움직여 친히 군마(軍馬)를 강(講) 받으심은, 신 등의 생각으로는 온당 못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군무(軍務) 요, 유희(遊戲)의 일이 아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다음날 월식이 있으니 군대를 사열하는 일을 취소하라는 좌의정 한치형, 우의정 성준, 영중추 정문형이 아뢴 글이다. 이것을 연산군은 단숨에 거절한다. 이렇게 정승들과 척을 지는 임금의 태도에 대해 그들이 문제 삼았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연산 4년 윤 11월 16일 정축 1번째 기사

 월식(月食) 해야 하는데 월식하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주희의 논리에 따르면 일식과 월식은 예측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나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펴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 날 월식이 발생하지 않은 건 성리학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연산군이 정치를 잘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날 일식은 발생하지 않은 것일까. 이 날은 공교롭게도 반영월식이었다.

연산 4년 반영월식

 월식이, 그것도 한밤중에 정확히 발생하였음에도 반영월식이라서 관상감의 관원이 발생한 줄을 몰랐던 것이다.

 관상감에서는 낮과 밤의 관측 당번을 상번-하번이라고 했는데 하번은 밤 중에 관측했던 사실에 대하여

측후 단자를 2개를 작성하였고 이것은 다음날 하나는 승정원, 다른 하나는 시강원(동궁)으로 보내졌다.

(경석현, 17세기(인조~현종) 연대기 자료의 재이(災異) 기록 재검토-『동궁일기(東宮日記)』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제68집,109 - 145 (2014))

 아마도 이 당시 경력이 30년을 넘은 일관 성담기가 보내온 월식을 관측하지 못했다는 측후 단자가 세자시강원의 부(傅)를 겸직하던 우의정 성준의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본인이 정승이 되고 여태껏 겪어 보지 못했던 일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듯하다. 연산군의 입장에서는 득의양양 아니었을까.


Round 3.


4년 뒤인 연산 8년 1502년, 또다시 월식이 일어났다.

연산 8년 반영월식

 이번에도 월식은 지구의 반그림자를 지나가는 반영월식이었다. 그런데 4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월식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긴다.


'연산 8년 3월 16일 무자 1번째 기사

 월식(月蝕)이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분명히 반영월식인데도 월식이 있었다고 적어놓은 것이다. 물론 이때 반영월식은 달이 지구의 본그림자를 스쳐 지나갈 정도로 근접하여 지나가서 달의 한쪽면이 조금 더 어둡게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이 가려지는 부분월식은 아니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월당식 불식'이라고 보고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다시 월식이 생겨야 하는데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주자학적 논리에서 연산군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쓰이기 때문에 신하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1. 반영월식이나 기상이 맑고 해서 달이 밝기가 변하는 것을 보고 일관들이 월식을 보고했을 경우

2. 월식을 관측하지 못한 측후 단자가 왔는데 이를 묵살하고 월식이 있었다고 기록한 경우

3. 월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실록 편찬과정에서 월식 추보 기록을 가지고 '月食'이라고 기재한 경우

 가능성이 있을까.

1. 일관들이 월식이라고 보고한 경우라면 30여 년 베테랑 일관 성담기가 관여할 수 있다.

2. 당시 영의정은 한치형, 좌의정이 성준이었다. 4년 전의 일을 되풀이할 수 없었을 지도.

3. 실제로 실록에는 관측하지 않았지만 일식, 월식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상소가 그 해 음력 9월 16일에 있는데,


'연산 8년 9월 16일 을유 3번째 기사

... 금년은 흉작이 이미 심했고, 재변(災變)이 여러 번 일어났으니 화기(和氣)를 손상시켜서 재앙을 부르게 된 것은  반드시 토목 공사에서 연유되었는데도... 너희들이 비록 하늘의 경계에 조심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식(日蝕)·월식(月蝕)이나 수재(水災)·한재(旱災)로 흉년이 된 재변이 40, 50년에 한 번 나타나면 마땅히 놀라서 두려워해야 하겠지마는, 이와 같은 재변은 해마다 있는데 군주가 만약 하늘의 경계를 조심한다고 일을 폐지한다면 길이 팔짱만 끼고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이 해 흉년과 재변이 있음은 인사와 행정에 잘못이 있었다는 상소에 대하여 연산군이 답한 것이다. 이때 재변으로 월식이 포함된 것을 보면 그 해 음력 3월 월식을 두고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이 1차 사료들을 두고 가감이 있을지언정 당시 전교에 월식이 있었기 때문에 음력 3월에 월식을 예측한 기록으로 간단하게 기재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이때 반영월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월식이 있었다고 보고가 되었고 그것을 신하들이 상소에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Round 4.


 이듬해인 연산 9년 1503년, 또다시 월식이 발생한다. 월식이 발생하던 음력 2월 16일보다 하루 전인 15일에 경연에서 일식과 월식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연산 9년 2월 15일 임자 1번째 기사

 햇무리가 졌다. 경연에 납시어, 《통감강목》을 강하는데,  덕종(德宗) 본기(本紀)에 ‘여름철 5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참찬관(參贊官) 김감(金勘)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 번진(藩鎭) 이 강성해지고 황실(皇室)이 미약해졌으니, 일식의 변괴는 어찌 그 응험(應驗)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동지사(同知事) 성현(成俔)은 아뢰기를, "일식과 월식은 비록 정하여진 자연의 법칙이지만, 군주가 진실로 능히 수양하고 반성하면, 일식 할 때에 일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성현의 말은 당시 사대부들이 가지던 주자학적 재이관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날 생겨난 월식이 또다시 반영월식이었다.

그리고 이 날 월식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月當蝕至是不蝕)고 기록되었다. 연산군은 애초에 일식이나 월식이 지상의 임금의 행실과는 상관없는 자연현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일식과 월식은 원래 정해진 자연의 법칙이 있지만, 군주가 덕행을 닦아 정치를 행하면 일식·월식을 할 때 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사실인가? 또 일관은 일식·월식을 할 때를 먼저 알아서 어긋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어쩐 일인가? 어제 강한 《통감강목》에 이르기를 ‘여름 5월에 일식이 있었다.’고 했는데, 대체로 정해진 자연의 법칙이 있어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덕행을 닦아서 일식을 하지 않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일식·월식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이 군주에게 달렸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 같다."'

- 연산군일기 - 연산 9년 2월 15일


연산군의 이 말에 승정원이 대답한다.


'일월이 빛을 잃는 것은 재변의 큰 것입니다. 옛말에 ‘일식에는 덕행을 닦아야 하고 월식에는 형벌을 잘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군주가 진실로 능히 덕행을 닦고 정치를 행하면 일식·월식을 할 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유(先儒)들의 변할 수 없는 정론입니다. 그러나 요제(堯帝)·순제(舜帝)·우왕(禹王)·탕왕(湯王) 때에 일식·월식을 할 때 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없고, 조송(趙宋) 희령(熙寧) 연간에 와서 일관이 아뢰기를

'일식을 할 때인데 일식을 하지 않습니다.’고 하여, 모든 신하들이 궁궐에 들어가서 하례했습니다.

 대체로 일식을 꼭 그믐과 초승에 있고 월식은 꼭 보름에 있는 것이 정해진 자연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 연산군일기 - 연산 9년 2월 15일


 승정원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의 주장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찾아본 결과 송나라 때 일식이 생기지 않아 신하들이 축하드렸다는 기록만 있다는 점에서 연산군 말에 수긍하듯 자연의 법칙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덧붙여 이런 말도 한다.


'그러나 해는 양(陽)의 정기요 달은 음(陰)의 정기이므로, 군신으로 말하면 임금은 양이요 신하는 음이며, 군자와 소인으로 말하면 군자는 양이요 소인은 음이며, 중국과 이적(夷狄)을 두고 말하면, 중국은 양이요 이적은 음입니다. 양이 음을 이기는 것은 오히려 말할 수 있으나, 음이 양에 항거하는 것은 말할 수 없으므로 《춘추(春秋)》에 일식은 기록했고, 월식은 기록이 없습니다.

- 연산군일기 - 연산 9년 2월 15일


 음양의 이치에서 양(陽)인 태양이 중요하고 달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월식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개똥 논리다. 이 말은 월식이 있었거나 아니면 '월당식불식'이었거나 하는 기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는 애매한 답변이다.

 그리고 6개월 뒤 이 논의가 한번 더 있는데 이때부터 당시 신하들의 월식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된다.


'연산 9년 8월 23일 정사 3번째 기사

전교하기를, "일식·월식과 지진은 모두 재변인데, 옛사람들이 반드시 일식을 적으면서 월식은 적지 않았으니 무슨 일인가? 월식 역시 지진의 유인 것이다." 하니, 정원에서 아뢰기를, "해는 양(陽)의 정기로서 인군의 형상인데, 먹히므로 특별히 써서 경계를 남기는 것이요, 달은 음의 정기인데 양에게 자극을 받아 먹히는 것이 흔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지진은 이와 다르니, 땅의 도(道)는 항상 고요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움직이는 것은 이 역시 음기(陰氣)가 성한 것이니, 또한 재변의 큰 것입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무슨 소리냐면 달은 음의 기운이며, 신하를 상징하기 때문에 임금을 상징하는 태양의 기운으로 인해 달이 먹히는 월식은 불길한 변고가 아니고 흔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저의는 곧 흔하게 먹혀야 하는 달이 먹히지 않는 것은 태양의 기운이 약하다는 소리로 임금 너 탓이라는 뜻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논리로 그동안 3번의 반영월식을 통해 '일식과 월식 모두 재변이다'에서 '월식은 재변이 아닌 흔한 일이고 월식이 생기지 않는 게 재변'으로 뒤바꿔 버린 것이다. 재이에 대한 연산군과 사대부 간의 싸움에서 어떻게든 논리적 우위를 차지하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때 당시 영의정이자 관상감 영사는 누구였을까. 바로 성준이었다.

 연산군 입장에서는 분노가 차올랐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래서 그랬을까. 비단 이것이 이유는 아닌 여러 이유 -흔히 페비 윤씨 사건-로 인해 갑자사화가 일어나고 성준은 유배되었다가 다시 끌려와 교살당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치형은 부관참시되었고, 이들의 일가족 또한 몰살당하게 된다. 성현 또한 갑자사화 직전 사망하였다가 역시 부관참시되었다.

 성종 시기까지 함께 승승장구하였지만 연산군 말기에 성준, 성현 두 족친의 비참한 결말을 볼 수밖에 없었던 일관 성담기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또한, 얼마 후 관상감의 재변 보고가 마음이 안 들었던 연산군은 관상감을 철폐하고 사력서(司曆署)라는 기구로 강등시키기까지 한다.

 다행히 중종반정으로 성준, 성현은 신원이 회복되고 관상감 또한 원상 복귀되어 성담기는 일관으로서의 삶을 계속한다. 그러나 한참 뒤 장경왕후 희릉 사건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성담기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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