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 좌가려에서 을파소까지.
고구려 신대왕이 죽고 둘째 아들인 백고가 왕위에 올라 고국천왕이 된다. 고국천왕 시대에도 여러 천문현상이 당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4년(서기 182) 봄 3월, 갑인(甲寅)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太微) 성좌를 관통하였는데, 마치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6년(서기 184),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고국천왕 [故國川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붉은 기운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대체적으로 오로라 현상으로 인식한다. 어쨌든 2년 뒤 한나라의 침공과 연결 짓고 있다. 그 뒤 고국천왕 8년에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8년(서기 186) 여름 4월, 을묘에 형혹(熒惑, 화성)이 심성(心星) 자리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고국천왕 [故國川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심성은 지금의 전갈자리 안타레스 별로 적색 거성이다. 붉은 별의 대표 격인 안타레스에 화성이 만나는 것은 큰 전란의 징조로 여겼다. 더욱이 그 만나는 방법이 화성이 역행하여 머무는(守) 형태일 때는 더 그렇다. 당시 화성의 겉보기 운동을 살펴보자.
186년 초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순행하던 화성이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역행하다가 심(心) 수의 가운데 별인 안타레스 근처에 정확히 머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후한서 천문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中平三年四月,熒惑逆行守心後星,十月戊午,月食心後星。占曰:「為大喪。」後三年而靈帝崩'
'중평 3년 4월 형혹성이 역행하여 심후성에 머물렀다, 10월 무오일에 달이 심후성을 먹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큰 상이 있으리라 하였다. 3년 후 영제가 세상을 떠났다.'
- 후한서 천문지 (한문고전 자동번역서비스의 번역문을 자체 편집)
화성이 심성에 머무른 일뿐 아니라 달이 심성을 가리는 기록도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일출이 된 시점에 식이 발생하여서 관측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고 후한서 천문지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 합당하다 볼 수 있다. 당시 후한은 유명한 삼국지가 시작되는 영제 말기였고, 위의 두 천문현상을 3년 후 영제의 사망과 연결 지었다. 위에 언급한 일식의 그림자가 지나간 일식도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일식은 중국 대륙을 지나갔는데 한반도는 절반정도 걸쳐져 있고 식분도 0.01에 불과하여 일식을 거의 관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당시 일식 기록은 후한서와 같은 중국 기록을 옮겨왔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달이 심성, 안타레스를 가린 기록이 후한서에 같이 있는데 그것은 옮기지 않은 점을 볼 때 실제로 관측에 의거한 기록일 수도 있다. 아무튼 위에 열거한 천문 기록은 190년 발생하는 외척 어비류와 좌가려의 난과 연결된다.
'12년(서기 190) 가을 9월,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자녀를 겁탈하고 토지와 주택을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네 연나(椽那)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13년(서기 191) 여름 4월,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했다. 임금은 왕도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고국천왕 [故國川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좌가려 등의 난을 평정한 후 고국천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인재 추천을 명하였고 이에 안류라는 사람이 추천을 받는데 안류는 또다시 왕에게 을파소를 추천한다. 을파소가 등용된 후 얻은 관직이 낮아 거부하자 바로 국상으로 임명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후 나라를 평안히 다스리다가 산상왕 7년(203) 8월에 죽으니 백성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곡을 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이 세상을 뜬 후 고국천왕의 동생인 발기(發歧)와 연우(延優) 중 연우가 산상왕에 즉위하였다.
이때 고국천왕의 왕후가 자신을 대접한 발기와 연우의 태도를 보고 선택을 한 것인데, 197년 발기는 이에 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결하게 된다. 이 발기의 난이 산상왕기의 전반부에 크게 다뤄지고 있는데 여기에 연결된 천문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197년에 근접하여 한반도에는 이렇다 할 일식이 실제로 없었다. 다만 월식의 경우 196년 양력 1월에 개기일식에 가까운 부분일식이 있었다.
산상왕 시기에 있는 일식 기록은 219년에 기록이 있는데 아래와 같이 비록 일몰 시와 겹쳤지만 한반도에서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는 일식이었다. 이 일식은 아래와 같이 여러 천변과 이변 현상들과 함께 얼마 후 산상왕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21년(서기 217) 겨울 10월, 우레가 치고 지진이 났다.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23년(서기 219) 봄 2월, 그믐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24년(서기 220) 여름 4월, 이상한 새들이 궁궐 뜰에 모였다.
31년(서기 227)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산상릉(山上陵)에 장사 지내고, 호를 산상왕(山上王)이라 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산상왕 [山上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참고로 219년은 관우가 사망하는 해이고 이듬해인 220년은 조조가 사망하며, 헌제가 위왕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한나라가 멸망하는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