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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Oct 11. 2023

삼국사절요에 기록된 행성과 달의 만남

행성이 달에 들어간 입월(入月) 기록

 삼국사절요는 세조가 동국통감과 함께 편찬을 지시하여 성종 대 이파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각각의 본기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삼국사절요는 이것을 하나로 묶어 편년체로 엮었기 때문에 연도별로 한눈에 기록을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번 글에서 삼국사절요에 나와 있는 삼국사기 원본에도 포함된 행성에 대한 달의 엄폐 현상, 즉 '달에 들어감(入月)' 기록을 살펴볼 까 한다.

 삼국사절요의 내용은 동방미디어에서 제공하는 아래 사이트를 활용하였다.

http://www.koreaa2z.com/viewer.php?seq=35


삼국사절요의 천체 입월 기록은 670년, 즉 통일 신라 이후부터 기록이 되어 있다.


670년 12월 - 토성        679년 6월 - 태백성(금성)        700년 6월 - 목성

*701년 2월 - 혜성        779년 3월 - 태백성                 801년 9월 - 형혹성(화성)

850년 1월 - 토성          855년 12월 - 토성



1. 670년 12월


12월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 중시(中侍) 지경(智鏡)이 사직(辭職)하였다.

○ 왜국(倭國)이 국호(國號)를 일본(日本)으로 고치고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 신라에서 촌도전(村徒典)을 설치(設置)하고 간(干) 1인, 궁옹(宮翁) 1인, 대척(大尺) 1인, 사(史) 2인을 두었으며, 또 고역전(尻驛典)을 설치하고 간옹(看翁) 1인, 궁옹(宮翁) 1인을 두었다.

 - 삼국사절요 - 동방미디어


 천문연구원의 음양력 변환 결과 670년 음력 12월 1일은 671년 1월 17일(율리우스력)이다. 그런데 671년은 토성의 궤도와 달의 궤도인 백도가 겹치지 않고 가장 많이 벌어져 있는 시점이었다. 현재 서울 기준에서 봤을 때 토성이 달에 엄폐되는 현상은 아래와 같이 668년 5월과 674년 8월이다.

668년 5월 토성-달 엄폐현상 (누벽진)
674년 8월 토성-달 엄폐현상 (위-묘수 사이)

 토성과 달이 스쳐 지나가는 범월(犯月)은 비일비재할 수 있으나 달이 엄폐되는 입월(入月) 현상은 드물기 때문에 시간의 이정표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토성과 달이 범하면 병사(兵事)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668년 8월의 엄폐현상은 특히 '누벽진'별자리에서 이루어졌는데 '누벽진'과 '우림군' 또한 병사를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공교롭게도 668년은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이고 670년은 7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이듬해인 671년 설인귀와 문무왕의 서신 교환 후 본격적으로 전쟁이 개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70년에 근접한 위 두 토성-달 엄폐현상은 모두 계절이 겨울과는 멀기에 668년의 현상을 끌어와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2. 679년 6월


봄 정월 중시(中侍) 춘장(春長)이 신병(身病)으로 사직(辭職) 하니 서불한(舒弗邯) 천존(天存)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 2월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耽羅國)을 돌아보게 하였다.

○ 궁궐(宮闕)을 중수(重修)하였는데 지극히 장려(壯麗)하였다.

○ 여름 4월 형혹성(熒惑星 화성(火星))이 우림성(羽林星) 자리를 지켰다.

○ 6월 태백성(太白星)이 달에 들어갔고 유성(流星)이 삼수(參宿)의 대성(大星)을 범(犯)하였다.

○ 가을 8월 태백성이 달에 들어갔다.

○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存)이 졸(卒)하였다.

○ 동궁(東宮 태자궁(太子宮))을 창건(創建)하였다.

○ 비로소 궁궐(宮闕) 내외(內外) 여러 문(門)의 액호(額號)를 정(定)하였다.

○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이룩되었다.

○ 남산성(南山城)을 증축(增築)하였다.

○ 당(唐) 나라에서 김인문(金仁問)을 진동대장군 겸 우무위위대장군(鎭東大將軍兼右武威衛大將軍)으로 삼았다.

 - 삼국사절요 - 동방미디어


 태백성-달의 엄폐사건 기록 전에 음력 4월에 있는 화성이 우림군 별자리에 머무는 현상은 양력 8월 20일부터 일어나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히 우림군 별자리가 아닌 근처이긴 하지만 말이다. 구당서에서는 당 고종 본기와 천문지에 화성이 우림군에 들어왔다(入) 또는 범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달과 금성의 엄폐현상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달과 금성의 엄폐현상은 양력 8월 20일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두 달 후 또다시 생겨난 엄폐현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추가적인 현상으로는 10월 3일에 토성과 달이 귀수 옆에서 근접했고 한 달 뒤 10월 30일에는 토성-달 간 엄폐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폐현상은 대낮이어서 관측이 불가능했다.

679년 10월 3일 토성-달 상범(相犯)
679년 10월 30일 토성입월 (관측불가)

 천문류초에서는 태백입월시 임금이 사망(主死)한다는 간단한 점괘의 설명이 있다. 2년 후인 681년에 문무왕이 55세에 사망하게 된다.


3. 700년 6월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다시 인월(寅月 1월)로서 정월을 삼았다.

○ 여름 5월 이찬(伊飡) 경영(慶永)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고, 중시(中侍) 순원(順元)이 이에 연좌(連坐)되어 파면(罷免)되었다.

○ 6월 세성(歲星 목성(木星))이 달에 들어갔다.


 700년의 이 기록은 구당서 천문지나 자치통감에도 없는 기록이다. 아니나 다를까, 700년에 목성이 달에 들어가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가장 빠른 목성-달 엄폐는 다음 해인 701년 3월이다.

 그러나 엄폐 현상이 낮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전체 영역은 관측할 수 없는 현상이다. 701년에는 이어서 아래 그림과 같이 3월과 4월에 연속적으로 관측이 가능한 엄폐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8월 13일경에도 엄폐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도 역시 아시아 지역은 낮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관측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700년에는 목성이 달에 가려지는 현상은 없었고, 이듬해인 701년에는 관측 가능한 2건과 관측 불가능한 2건이 혼재해 있었다. 목성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돌기 때문에 701년 한 해 동안 달의 궤도, 즉 백도(白道)와 겹치는 구간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700년에 목성이 들어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해에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역법을 개정한 사실이 있어 역법산정에서 오류가 있었거나 잘못 전달되어 왔는지 의문이다.


4. 779년 3월


봄 3월 서울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민가(民家)가 허물어지고 죽은 자가 1백여 인(人)이나 되었다.

○ 태백성(太白星 금성(金星))이 달에 들어갔다.

○ 백좌법회(百座法會)를 베풀었다.


 779년에 금성과 달이 엄폐를 이루는 경우는 없었다. 혹시 다른 행성과 만나는 현상이 잘못 적혔나 싶었지만 달의 움직임을 추적해 보았을 때 다른 행성과 엄폐를 이루는 경우도 없었다. 779~780년 동안에는 위에서처럼 지진이 있었다던가,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거나 흙비가 내리는 등 여러 재변이 있은 후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으므로 모후(母后)가 청정(聽政)하였는데 장성하자 성색(聲色)에 빠져 늘 부녀자(婦女子)들과 희롱을 하였으며 금낭(金囊) 차기를 좋아하였고 도류(道流)들과 희학(戱謔)하며 사방에 순유(巡遊)하기에 절도가 없었다. 이에 기강(紀綱)이 문란하고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니, 인심(人心)이 이산(離散)되었다. 여름 4월에 이찬(伊飡) 지정(志貞)이 무리를 모아 반란(叛亂)을 일으키고 왕궁(王宮)을 포위(包圍)하므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이 이찬(伊飡) 김경신(金敬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지정(志貞) 등을 주멸(誅滅)하였으나 왕과 후비(后妃)는 난병(亂兵)에게 피살(被殺)되었다. 이에 김양상이 자립(自立)하여 왕이 되었고, 전왕(前王)의 시호(諡號)를 혜공(惠恭)이라 하였으며,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그의 부친(父親) 해찬(解飡) 효방(孝芳)을 추봉(追封)하여 개성대왕(開聖大王)을 삼았고, 모친 김 씨(金氏)를 추봉하여 정의태후(貞懿太后)를 삼았으며, 김경신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을 삼았으니 양상은 내물왕(奈勿王)의 10 세손(十世孫)이요, 경신은 내물왕의 12 세손(十二世孫)이었다.'

 - 삼국사절요 본기


 당시 왕이었던 혜공왕이 반란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혜공왕의 자질 부족과 문란한 기강 때문이어서 재변이 자주 나타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그저 기강이 문란해졌다고만 쓰여 있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사절요는 도가 사상 때문이라고 콕 집어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혜공왕이 죽기 전 발생한 여러 재변의 한 가지로 태백입월(太白入月)을 들었으나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없었으므로 흉한 일의 전조 현상으로 끼워 넣은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5. 801년 5월


○ 여름 5월 초하룻날 임술(壬戌)에 당연히 일식(日蝕)이 있을 터인데 일식이 없었다.

○ 가을 9월 형혹성(熒惑星 화성(火星))이 달에 들어갔고, 별이 비처럼 떨어졌다.

 801년에 기록된 화성-달 엄폐도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다. 엄폐가 이루어졌던 비교적 최근 날짜는 798년 1월 23일이다. 이때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일당식불식', 즉 일식이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하지만, 실제로 경주에서는 식분 0.4의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고 기타 아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었던 일식이었다.


6. 850년 1월


봄 정월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 서울에 흙비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니, 사형(死刑)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850년의 토성-달 엄폐는 5월 13일이나 한반도에서는 관측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월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목성-달 엄폐현상은 관측이 가능하였다.


7. 855년 12월


봄 2월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서남방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 겨울 12월 진각성(珍閣省)이 불에 탔다.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이 때도 855년에는 엄폐가 없으나 이듬 해인 856년 5월 11일에  엄폐 현상이 관측 가능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신라 문성왕 김경응이 죽고 숙부인 헌안왕 김의정이 즉위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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