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왕&봉상왕 - 미스터리 한 273년 일식기록
고구려 서천왕 시기의 일식 기록은 273년 음력 7월 가을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일식은 있었으나 일식이 지나간 그림자는 동아시아의 어느 곳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삼국사기 일식 기록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진서 천문지 및 자치통감에도 나와 있다. 사마염이 다스리던 진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식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이 기록이 실제로 일식을 관측한 것이 아닌 일식을 예측하여 통보하는 행위가 있었으므로 풀이할 수 있다. 부정확한 당시 역법 수준으로 인해 일식이 발생할 시각은 맞추었으나 달그림자가 지나가는 위치까지는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지 않은 일식 기록을 굳이 넣었다는 것은 여기에 맞물려 따라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자치통감에서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주(사마염)가 조령을 내려 공경 이하 관원들의 딸을 선발하여 육궁(六宮)을 충당할 적에 숨기는 자가 있으면 불경으로 논죄하고, 채택이 끝나기 전에는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일을 임시로 금하여 공경의 딸 중에 선발된 이는 삼부인과 구빈으로 삼고 이천석과 장교의 딸은 양인 이하에 보충하게 하였다.
9월에 오나라가 사시(司市) 진성(陳聲)을 죽였다.
오주(손호)의 애첩이 사람을 보내어 시장에 가서 백성의 물건을 빼앗아오게 하였는데, 진성이 그를 잡아서 법률로 처벌하자 오주가 진노하여 다른 일을 빌미로 불에 달군 톱으로 진성의 머리를 잘라서 그의 몸을 사망산 아래에 던져버렸다.'
- 자치통감
사치와 향락에 빠진 진나라의 군주 사마염은 궁녀를 뽑기 바빴고, 오나라의 손호는 신하인 진성을 사사로운 일로 인해 죽이는 등 난세에 가까운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심지어 손호는 진성을 죽이기 전, 정사 삼국지 오서(吳書)의 원전인 같은 이름의 오서를 지은 위소까지 죽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어떨까. 우선 273년 기록은 아래와 같다.
'서천왕 4년(서기 273) 가을 7월, 초하루 정유(丁酉)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273년 기록에는 백성들이 굶주렸다는 기록뿐이지만 좀 더 아래로 내려가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1년(서기 280)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해 와서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이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왕위를 잘못 물려받아서 나의 덕이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멀리 떨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웃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어지럽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제 꾀가 많은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적을 멀리 꺾어 버리려 하니, 그대들은 각각 기이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자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임금의 동생 달가(達賈)는 용감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 만합니다.”
임금은 이에 달가를 보내 숙신을 정벌하게 하였다. 달가가 기이한 계략으로 적을 엄습하여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 주민 6백여 가(家)를 부여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항복한 부락 6~7곳은 종속국으로 삼았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겸하여 양맥ㆍ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괄하게 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서천왕 [西川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보통 일식은 불길한 사건의 전조로 보는데 여기서는 서천왕의 동생 달가가 등장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이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서천왕의 뒤를 이은 왕이 폭군 봉상왕이라는 것이다.
봉상왕이 왕위에 오른 뒤 제일 처음 벌어지는 사건이 다음과 같다.
원년(서기 292) 봄 3월, 임금이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죽였다. 임금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의심하여 음모로 죽였던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였다.
“안국군이 없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했을 것인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백성들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났다.'
- [네이버 지식백과] 봉상왕 [烽上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자신의 숙부이자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달가부터 죽인 것이다. 개기일식이 있었던 273년은 서천왕 4년인데, 아마도 확실하지 않지만 봉상왕이 태자에 오르는 시간도 그때쯤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비록 봉상왕이 언제 정확히 태자에 올랐는지는 기록에 없어도 이때 당시 두각을 나타낸 달가를 등장시켜 둘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차원에서 일식 기록을 넣었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서기 273년에는 기록되어 있는 음력 7월 가을이 아닌 음력 4월 봄에 일식이 한 번 더 있었다는 것이다. 음력 4월의 일식은 아래 그림처럼 달의 본그림자가 한반도를 정통으로 지나갔다.
이 날 일식은 아시아라 부를 수 있는 대륙의 모든 곳에서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중국 대륙은 물론이고 한반도와 일본까지 달의 본그림자가 지나갔고, 본그림자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대부분 식분이 0.5 이상인 일식이었다. 달의 그림자가 아예 지나가지 않은 음력 7월의 일식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대단한 일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식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고 중국의 사서에만 기록이 존재한다.
'계사년(273)
진나라 세조 무황제 사마염 태시(泰始) 9년이고, 오주 손호 봉황(鳳凰) 2년이다.
여름 4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자치통감
위에 언급한 손호가 명신인 위소를 죽인 사건이 이 일식과 맞물려 있는데, 사마염의 경우는 좀 다른 것이, 상소를 받고 명장 등애의 명예를 회복시키면서 손자 등랑을 낭중으로 삼는 이야기가 있다.
진서 천문지나 자치통감은 273년의 두 일식 기록이 모두 있는데 삼국사기는 실제로 발생한 음력 4월의 일식은 기록에 넣지 않고, 발생하지도 않은 일식을 넣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김부식이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본인이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음력 4월이나 7월 중 아무 일식이나 선택하여 적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목적은 봉상왕이 태자가 되고, 달가가 등장하고 이후 봉상왕이 달가를 죽이는 사건에 맞물리기만 하면 되니까.
자치통감 등을 보면 음력 4월의 일식은 단순히 일식이 있었다는 기록만 있는 반면 7월의 일식 기록에 사마염의 방탕과 손호의 폭정 같은 네거티브한 일들이 언급되어 있다. 통감강목으로 치면 강과 목이 잘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음력 4월 일식은 생략하고 7월 일식만 취사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직접 관측 기록을 인용했다면 개기일식 또는 개기일식에 가까웠던 4월 일식을 버리고, 아프리카나 호주 대륙에 있지 않은 이상 볼 수 없었던 7월 일식을 기재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