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에서 볼 수 있던 개기일식은 수시력에 영향을 미쳤을까?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은 지금의 북경 근처인 대도를 도읍으로 삼아 원나라를 건국하였고,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의 주청으로 전국 27곳의 북극출지고도와 하지점에서의 태양고도 및 시각 등을 가지고 좌표를 구하였는데 이것을 사해측험(四海測驗)이라고 하며 그 값을 원사(元史) 천문지에 실어 놓았다.
서은혜 님의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여몽관계의 추이와 고려의 역법운용'에서 중국역사지도집에 사해측험 장소를 간단히 표시하였는데, 출판된 논문에 표시된 그림으로 정확한 위치 파악이 어려워 아예 중국역사지도집 원판에 좀 더 자세히 표시해 보았다.
27곳의 관측지는 남해(南海), 형악(衡嶽), 악태(嶽台), 화림(和林), 철륵(鐵勒), 북해(北海), 대도(大都), 상도(上都), 북경(北京), 익도(益都), 등주(登州), 고려, 서경(西京), 태원(太原), 흥원(興元), 성도(成都), 서량주(西涼州), 동평(東平), 대명(大名), 남경(南京), 하남부(河南府) 양성(陽城), 양주(揚州), 악주(鄂州), 길주(吉州), 뇌주(雷州), 경주(瓊州)이다.
사해측험의 시기는 1279년경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곽수경이 수시력(授時歷) 편찬 작업을 하던 시기였다. 수시력은 청나라 때 시헌력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높은 정확도를 자랑하던 역법으로 명나라의 대통력도 수시력을 개정한 것이며, 세종대왕의 칠정산 또한 수시력을 조선의 위치에 맞춰 사용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가역상집 곽수경 전에 따르면 수시력 편찬을 위한 천체 관측의 시작이 1277년 음력 5월에 벌어진 개기 월식 때부터라고 서술하고 있다. 편찬의 시작이 1277년이고 반포가 1281년이었으니 1279년은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작업의 시간이었다. 곽수경은 원 황제에게 상소하여 지금의 정저우에 있는 등봉 관성대를 비롯 원의 영토 각지에 관성대를 건립하였다. 관성대(觀星臺)라는 이름은 첨성대, 사천대, 관천대 등 과거의 천문대를 나타내는 용어이나,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관성대’라는 용어가 범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고유 명사에 가까운 단어이다. 이렇게 관성대 건립 사업과 동시에 이루어진 사업이 사해측험이다.
여기에는 고려도 포함되어 있다. 곽수경이 건립한 관성대가 72곳이라고 되어있다는 점에서 이 27곳은 거점 상 매우 중요한 위치이거나 곽수경이 건립한 관성대들이 위치할 확률이 높은 곳이다. 고려 개경에 관성대를 건립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미 고려는 서운관에서 높은 수준의 천문 관측을 하고 있었고, 원 사신이 개경에 와 북극성의 고도를 확인하였다는 점은 원이 고려를 중요한 정치적 거점으로 인식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관성대의 건립과 수시력의 편찬은 황제의 황권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전부터 천자국을 자칭한 나라는 하늘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며 권위를 얻어왔고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정확한 역서를 주변 제후국에 반포하는 것이었다. 높은 수준의 천체 관측과 역법 계산이 존재해야만 정확한 역서의 반포가 가능했으므로 이것을 제후국에게 보내는 것이 황제의 권력유지의 필수 요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원세조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영토의 세(勢)가 어디까지인지 역사서에 박제하는 기능도 있었겠지만 곽수경의 입장에서 정확한 역법인 수시력을 만드는 데 사해측험이 필요했는데, 고려에서부터 저 멀리 시베리아까지 가서 북극 고도를 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고려사 충렬왕세가에 나오는 충렬왕 3년, 1277년 정축년 10월의 기록이다.
•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일. 일식(日食)이 있었다.
무오일. 김백균(金伯均)을 경상도 지휘사(慶尙道指揮使)로 임명했다.
기미일. 왕이 공주와 함께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
갑술일. 탐라(耽羅) 다루가치인 다라치[塔剌赤]가 원나라에 갔다.
을유일. 원나라에서 낭기아다이[郞哥歹]를 보내 송골매를 내려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렬왕 3년(1277) 정축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0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정확하게 이를 뒷받침하는 일식 기록은 1277년 10월 28일 일어난 개기일식이다.
이 일식은 동아시아 전체에서 관측이 가능하였고 특히 러시아 몽골, 중국,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까지 본그림자가 지나가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위 그림처럼 우리나라는 제주도 전체와 전라남도 일부에서 개기일식의 관측이 가능하였다. 개기 일식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감상해 보자.
당시 제주도는 정확히 탐라군민다루가치총관부에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다스려지는 영토였다. 위의 고려사를 다시 보면 갑술일. 그러니까 초하루였던 병진일로부터 19일 후 탐라 다루가치인 탑라적(塔剌赤, 다라치)이 원나라로 떠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홍익대 역사교육과 배숙희 교수는 그의 논문 '원나라의 탐라 통치와 이주, 그리고 자취 (중국사연구 76호 p.95-122)'에서 탐라 다루가치 탑라적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원 14년(1277) 10월에 원나라로 갔다가 이듬해 2월에 원나라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원사(元史)에서는 지원 14년에 탑라적이 돌아왔다는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탑라적이 떠나고 11일 후인 을유일에 원나라는 낭기아다이를 고려에 보내 충렬왕에게 송골매를 내려 준다.
응방(사냥용 매를 키우던 관청)을 만들어 매사냥을 즐겼던 충렬왕에게는 값진 선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듬해 2월 고려사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경오일. 탐라(耽羅) 다루가치인 다라치[塔剌赤]가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편에 황제가 왕에게 해동청(海東靑)을 내려주었다.
해동청도 송골매의 일종으로 고려에서 몽골에 바친 공물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바친 게 아니라 주었다고? 이전 해의 기록은 관련이 없을지 몰라도, 이 기록은 확실히 탑라적을 통해 쿠빌라이가 직접 선물로 해동청을 보낸 것이다. 1277년 10월 개기일식이 일어난 직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난 탐라의 다루가치, 그리고 그가 이듬해 황제의 선물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 당시 고려와 몽골(원)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1270년대는 길었던 무신 집권과 대몽항쟁이 끝나고 고려 시대의 말기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원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중국에 대한 사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후손인 우리 중 대다수는 이 시기의 역사를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문화가 퇴행하던 무신 집권기가 끝났다는 것과 최소한 고려 내에서 전란이 잠시나마 사라졌다는 점, 그리고 고려가 원 황제의 부마국으로 혈연관계가 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대륙 본토가 활동 무대가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변화를 이룬 시대이기도 하다.
1271년 김통정이 죽으며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끝을 맺게 된다. 원은 제주도, 즉 당시의 탐라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했다. 일본 정벌까지 꿈꾸던 원황제 쿠빌라이에게 탐라는 군사적 거점으로 매우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온난한 기후와 넓은 초원은 군마를 기를 목장으로, 풍부한 목재는 전함을 제조하는데 더없이 준수한 조건이었다. 이에 쿠빌라이는 1273년 탐라국초토사를 설치하여 탐라에 대한 직접 통치를 시작하였고, 1275년 탐라군민다루가치(達魯花赤) 총관부를 두어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직할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원나라는 정복 전쟁을 하면서 정복한 곳에는 원래 다스리던 지배 세력을 그대로 두는 대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그들 위에서 제어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탐라 다루가치가 파견되는데, 첫 번째는 실리백(당시에는 초토사였음)이란 사람이었고, 두 번째로 손탄, 그리고 1277년 세 번째로 탑라적이 파견된다.
탐라 다루가치는 당시에 정 3품 벼슬로 꽤 높은 직급이었다. 그만큼 원에서 탐라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첫 번째 가치는 군마를 키울 수 있는 목장으로써의 가치이다. 탑라적이 몽골 말 160 필을 데려 오면서 제주도에 말이 특산화되는 시작이 되었다. 당시 목장의 규모는 원나라를 통틀어 두 번째일 정도로 규모가 큰 목장이었다. 두 번째는 전함을 제조할 양질의 목재였다. 이 두 가지는 당연하게도 일본 정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가치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주도에서 일본에 건너갈 전함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비단 목재뿐만 아니라, 섬이라는 특성상 바다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탐라인들이 높은 수준의 선박 제조술 및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륙에서의 전쟁에만 익숙한 몽골인들이 전함 제조를 위해 제주인들을 가혹하게 노동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탐라인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실질적인 주체는 이미 그전부터 탐라국의 통치자였던 성주와 왕자 가문이었다. 성주(星主)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북두칠성을 관장하고 모시는 칠성제의 제주였는데, 이는 미신적 신앙도 있겠지만, 나침반이 없던 당시 항해를 위해 별자리를 이용해 방위를 정확히 읽어야 했고 북쪽을 나타내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높은 수준의 천문학적 지식을 보유하였기 때문에 성주라고 부른 것이다. 원이 다루가치 총관부를 두기 전 고려에서의 탐라는 이전부터 존재한 탐라국의 왕인 성주(星主)와 다음 서열인 왕자(王子)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이 시기의 성주는 고인단이고, 왕자는 그동안 세습해 오던 양 씨에서 문 씨로 바뀌어 문창유란 이가 맡고 있었다.
[탐라지]에 따르면 다루가치 밑에 총관, 부총관 등의 관료는 몽골인이나 그 이하의 관직은 대부분 탐라인이 맡았다. 그중 지방(知房)이란 직책이 문서 처리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부, 고, 문 씨가 담당하였다고 되어 있다. 탐라가 원나라의 직속 영토에 편입되었어도 실질적으로 다스리던 탐라인들이 다루가치 총관부에서 관직을 가졌다는 것이다.
한 편, 충렬왕은 고려의 임금 중 최초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고려 최초의 원 황제의 부마가 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원종은 쿠빌라이 칸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후 쿠빌라이가 원하는 외교적 협약에는 미지근하게 대응하여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 고려의 사신을 접견할 때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라며 공공연히 비난하기도 했다. 원종이 죽고 뒤를 이어 충렬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쿠빌라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쿠빌라이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부마에 오른 충렬왕은 고려라는 국가의 임금보다는 원나라의 중앙정치에서의 위치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고려에 대한 불신임은 그러한 충렬왕에게는 가장 큰 악조건이라 볼 수 있었다. 이런 시기에 고려의 재상 김방경의 무고 사건이 생기게 되는데 이 사건은 처음에는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홍다구란 인물이 등장하면서 점점 심각하게 꼬이게 된다.
홍다구는 원나라에 항복한 홍복원의 아들로, 홍복원이 왕족인 왕준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고려 왕조에 적개심을 품었던 인물이다. 나중에 누명이 풀리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은 홍다구는 삼별초의 난 때 여몽 연합군을 지휘하며 이름을 날렸다. 특히, 진도에서는 삼별초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이 옹립한 왕인 승화후 왕온을 직접 베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왕온은 왕준의 동생으로, 당시 김방경을 필두로 한 고려군 측에서는 어떻게든 왕족인 왕온을 살려내려 했으나, 홍다구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먼저 찾아 그를 죽인 것이다.
이후로 김방경과 홍다구는 삼별초의 진압과정에서 잦은 의견 충돌을 보였는데, 홍다구의 입장에선 김방경이 눈엣가시였을 것임이 당연하다. 그러한 김방경이 무고를 당한 사건을 들은 홍다구는 사건의 진상을 다시 조사해 봐야 한다며 쿠빌라이의 윤허를 받아 고려로 파견되어 왔고 직접 김방경을 국문함과 동시에 내정에 간섭하며 온갖 전횡을 부린다.
홍다구의 전횡은 이를 보다 못한 쿠빌라이의 충복 낭기아다이가 원에 돌아가 당신의 만행을 고해바치겠노라 할 때까지 계속된다. 힘이 없던 충렬왕은 김방경에게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권유할 정도였고, 이를 거부한 김방경은 끝내 만신창이의 몸으로 대청도로 귀양가게 된다. 이후 홍다구는 청탁을 받은 이들을 요직에 앉히며 계속해서 전횡을 부리는데,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홍다구가 황제인 쿠빌라이를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렬왕이 부마이긴 하나, 고려 조정에 불신임이 깊었던 쿠빌라이는 홍다구를 이용하여 고려를 제어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나라, 고려, 그리고 탐라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변하는 시기에 놓여 있었고, 곽수경이 수시력 편찬 사업을 시작하고, 홍다구가 충렬왕을 무시하며, 다루가치 탑라적이 제주에 도착한 그 해가 1277년이다.
다음 그림은 1277년 음력 10월 1일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본그림자가 지나간 부분과 그로부터 2년 후인 1279년 사해측험이 실시되면서 원사(元史) 천문지에 실린 27곳의 위치를 함께 표시한 것이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사해측험 장소 중 철륵, 화림, 상도, 북경, 서도 대도, 익도, 등주 등의 주요 지점이 일식의 본그림자가 지나가는 곳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 중 대도가 지금의 베이징이고, 화림이 몽골의 울란바토르이다. 즉, 원나라 시절 몽골인들의 고향인 화림에서부터 수도인 대도를 지나 산둥반도를 통과하는 의미심장한 일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곽수경이 1277년 수시력 편찬을 위한 천체관측을 실시하면서부터 수시력을 반포한 1281년까지 유일하게 관측되었던 개기일식이기도 하다.
역사상 최초로 동아시아 전체를 섭렵했던 원나라였기에 각 지역에서 관측한 일식 기록은 그 시작과 끝 시각, 해가 가려진 정도인 식분(食分) 등이 체계적으로 곽수경에게 모였을 것이다. 곽수경의 입장에서 이러한 관측 장소들의 정확한 위치 좌표를 알아야만 그림자가 지나가는 속도를 계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해 측험이 이루어진 장소 중 개기일식의 본그림자가 겹치는 장소는 한 군데 더 있다.
철륵의 경우 중국역사지도집에 '철륵측경소(鐵勒測景所)'라고 그 위치가 정확하게 나와 있으나 북해의 경우 아예 위도상 표시가 안되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위도 65도이며 중국 측 연구에는 러시아 중부 퉁구스카 강 유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사해측험을 실시한 주요 지점들이 1277년 개기일식의 달의 그림자가 지나간 곳과 일치한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공교롭게도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만약 원나라의 영토가 중국대륙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일식의 본그림자의 궤적은 거의 직선에 가깝게 보이게 된다. 따라서, 곽수경을 비롯한 천문학자들을 이 데이터를 가지고 달의 운동 방정식을 구할 때 직선의 방정식인 일차함수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멀리 탐라에서 개기일식이 관측된 것이다. 만약 일식의 데이터가 특히 사해측험 장소 중 산둥반도인 익도(중국 웨이팡 시)에 머물렀다면 이를 바탕으로 유추하여 달의 그림자 궤적을 직선으로 표현하였을 때 아래 그림과 같아야 한다.
따라서 제주에서의 개기일식 관측은 당시 곽수경을 비롯한 천문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대도, 익도, 그리고 탐라의 당시 일식의 시작과 끝 시각이다.
위 표를 바탕으로 한 일식의 시간을 아래와 같이 계산하면,
개기 일식의 본그림자에서도 거의 가운데(위 일식도의 붉은 선)를 지나가야만 개기일식을 길게 관측관측할 수 있다. 즉, 대도와 탐라에서의 개기일식 진행시간이 유사한 것은 본그림자가 유사한 영역을 지나갔다는 뜻이고 따라서 궤적이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틀면서 진행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구가 평면이 아닌 구면체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당시 일식이 일어났을 때 한반도가 구면의 테두리 쪽에 위치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테두리 쪽으로 갈수록 달의 그림자는 점차 타원형으로 굴곡지면서 속도도 빨라지게 된다. 따라서, 탐라에서의 일식 데이터를 손에 얻었어야만 본그림자의 궤적이 직선이 아닌 곡선이기 때문에 달의 운동 방정식을 일차함수가 아닌 2차 함수로 표현해야 했다.
또한 달이 움직이면서 태양도 같이 움직인다는 점도 인지해야 했다. 예컨대 전등으로 공을 비춰 벽면의 그림자를 본다고 가정했을 때, 전등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공을 직선으로 움직이면 그림자도 같은 방향으로 직선으로 이동하지만, 공이 움직임과 동시에 전등 또한 천천히 위 또는 아래로 움직이면 그림자의 궤적도 직선이 아닌 형태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해와 달의 상대속도라는 개념인 정한행도(定限行度)라는 개념도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실로 귀한 데이터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만약 원나라가 그 영향력을 고려와 제주도까지 뻗지 않았다면 수시력이 그만큼 정교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만약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 성공해서 일본까지 다루가치가 파견되고 본그림자 궤적이 지나간 가고시마, 나가사키 등의 일식 기록을 얻었다면 어땠을까.
탐라의 일식 자료는 비록 당시 제주도가 다루가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를 관측했을 실무자는 성주와 왕자 같은 탐라인 들이었고, 아무래도 지정학적 특성상 이 결과 보고는 육로인 고려를 통과하면서 오윤부가 있던 고려의 서운관과 충렬왕을 거쳐 원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게 소식이 오가는 19일 만에 탐라 다루가치 탑라적이 원나라로 소환되었고 쿠빌라이는 공로를 인정하여 탑라적 뿐 아니라 고려의 충렬왕에게 송골매를 선물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 해인 1278년 일부러라도 입조를 허용하지 않던 쿠빌라이는 김방경 사건을 직접 조사해야겠다며 관련인들을 사위인 충렬왕이 직접 데려 오도록 지시한다. 또한 쿠빌라이를 만난 충렬왕은 홍다구의 전횡을 알리며 그를 송환해 주길 요청했고 쿠빌라이는 이를 들어준다. 대청도로 귀양 갔던 김방경이 다시 풀려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단 1년 만에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사위인 충렬왕과 고려를 대접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1277년 제주도에서 관측된 개기일식이 발생한 음력 10월과 함께 출발한다. 아직까지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료가 없는 가설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