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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어화 Sep 29. 2021

독박 탈출을 위한 준비

맞벌 주부인 나는

최근까지 집안일과 살림, 육아를 도맡아 했다.

늘 바쁜 신랑은 집에 오면 쉬어야 했고

직장을 다니는 나도 퇴근 후 피곤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저녁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세탁기를 돌리고...

원더우먼처럼 살았다.

연례행사로 두어 번은 크게 몸살을 했지만 그 당시엔 바쁜 신랑이 안쓰럽기만 했고 어린 아들과 딸의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힘든 줄을 몰랐다. 

두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는 더없이 귀하고 감사한 아이다. 내 나이 31세 겨울, 결혼하고 얻은 첫 아이를 임신 5개월 차에 유산을 했다. 그리고 6개월 뒤에 아들을 임신했고 건강하게 출산을 했다. 첫아이가 딸이었기에 그 아이가 다시 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열심히 마음으로 빌라던 우리 엄마의 말씀에 나도 우리 엄마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인지 20개월 터울의 예쁜 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땐 육아가 감사한 일이었고 신랑에게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있어서 피곤해하는 신랑이 안쓰러웠지 밉지 않았다. 그러니 부부싸움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20년이 다 되어가니...

 눈에 씌워져 있던 콩깍지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하고 무서울 것이 없다는 대한민국의 40대 아줌마가 되면서 내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생기고 나는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에피소드

미혼인 후배에게 결혼을 독려하던 선배가 지나가던 나에게 물었다.

"조 부장, 결혼의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얘기해봐~후배에게 도움이 되게."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결혼의 좋은 점은 심리적 안정이죠.

내 가족이란 울타리가 생기고

토끼 같은 아이로부터 받는 행복도 크죠."

"거봐. 결혼하면 저런 좋은 점이 있다니까! 

그럼 안 좋은 점은?"

질문한 남선배는 나의 답변에 만족하며 기대 섞인 표정으로 다음 답변을 기다렸다.

"독박!"

나는 간결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여후배는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고, 남선배는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독박쓰고 있어요. 직장에 살림, 육아까지!"

"와~쎈데. 독박은."

남선배의 말에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나는 여후배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야 조선시대 마지막 남자와 결혼해서 그런거구, 요즘 젊은 남자들은 달라.

가정적이고 모든 일을 의논해서 공평하게 하고.  가사와 육아를 내가 도와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같이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지.  

나이와 결혼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아, 그리고 결혼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냐."

여후배는 수긍의 고개를 끄덕였고

남선배는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서둘러야지라는 표정짓고 있었다.

나는 여후배의 팔을 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독박"이란 말은 나에게는 적합한 말이다.

공감이나 거부감주기 위해 적는 게 아니다.

나의 상황에서는 독. 박.이라는 두 글자가 딱인 적합 용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독박이란 낱말을 쓰고 있지만, 여기엔 나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있고 신랑의 전적인 신임이 깔려있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생활은 지금까지 평탄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신랑 또한 내가 독박을 쓰며 생활하는 걸 알고 있다. 적어도 본인과의 결혼생활에서는.

그래서 늘 고마워하고 미안해한다.

하지만 문제는... 

늘 마음뿐이고 행동은 동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 더하면 더하지 모자람이 없다.

본인의 몸이 천근만근이고 본인의 머리가 업무와 이것저것들로 인해 복잡하면 주변을 보지 못한다.

 화장실에서 샤워나 목욕을 하고 나올 땐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바닥의 물바다는 기본이라 아들이 3~4살쯤 되었을 때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미끄러지는 일도 있었다. 

술과 사람을 좋아해서 금요일마다 술을 마시고 오면 토요일 반나절은 해장 식사를 하고 잠만 잤다.

가지 사실에만 근거해도 우리 집 남편은 한마디로 라떼 버전의 사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자는 단순하다.

그래서 시키면 군말 없이 한다! 시간차는 있지만!

단, 시킬 땐 구체적으로 말해주어야 하고 시키는 즉시 바로 실행하지 못해도 기다려줘야 한다.


결혼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 적기!

코로나로 인해 술자리도 거의 없고, 

본인의 사회적 지위도 바쁘고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여유 있게 걸어도 되는 평탄한 길에 올랐고,

또한 강산이 두 번은 변할 만큼 살면서 콩깍지는 거의 벗겨졌고, 신랑에서 "남편(남의 편)"이 되었기에

 또한 독박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씩 준비를 하고 있다. 

글은 나의 독박 생활 탈출을 위한 남편 훈련기이다.

 


독박 탈출기 & 남편 훈련기


1탄. 설거지

주말 설거지를 남편에게 맡겼다. 

하지만 남편은 설린이다. 설거지 어린이!

설거지통에 담긴 그릇만 씻고는 끝이다.


설거지에도 수준이 있다.

하수: 설거지 그릇만 씻는다.

중수: 행주로 식사한 식탁 위도 닦다.

고수: 음식물 쓰레기까지 정리한다.

지존: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 말려진 식기를 정리한다.


우리 집 남편은 하수급이다!

그래도 설거지를 하는 게 어딘가?

남편이 설거지를 할 땐 모른 척해야 한다.

입을 대면 누구나 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굳이 칭찬을 남발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기분이 내키면 한 번씩 칭찬을!



2탄. 청소기 돌리기

주말 청소는 남편에게 맡겼다.

청소기를 돌리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아들이 더 많이 돌리고 남편은 청돌린이다.

청소기 돌리기 어린이!

청소기로 대충 눈에 보이는 곳만 ~쓱 밀고는 끝이다.


청소기 돌리기에도 수준이 !

하수: 청소기로 대충 소리만 낸다.

중수: 청소기로 눈에 보이는 곳만 돌린다.

고수: 청소기로 구석구석 꼼꼼히 돌린다.

지존: 꼼꼼한 청소 후 먼지통도 비운다.


우리 집 남편은 중수급이다.

그래도 청소기를 돌리는 것에 만족한다.

사실 구석구석 꼼꼼히 청소하지는 못하지만 몸을 움직여 가전제품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랴.

나에겐 퇴직 후의 삶을 위한 10년의 플랜이 있기에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3탄. 요리하기

화목토 저녁을 남편에게 맡겼다. 3일은 과한 욕심이었다. 주말에 1회 정도가 적합하다.

아침은 내가 매일 차리고 설거지도 내가 다하며 월요일에서 금요 저녁도 내 몫이다.

배달을 시키지 않는 !

하지만 남편은 요청이이다. 요리 청소년!

어린이라고 하기엔 라면을 잘 끓이고 본인이 간단하게 먹을 볶음밥이나 가족여행 시 고기 굽기와 김치볶음밥 등은 할 줄 알기에 어린이라기보다는 청소년.

그나마 설거지, 청소 영역보다는 요리 수준이 제일 낫다.


요리에도 수준이 있다!

하수: 재료만 넓러 놓고 간이 맞지 않은 맛없는 요리

중수: 먹을 만 하나 본인이 더 만족스러운 요리

고수: 누가 먹어봐도 맛이 있는 요리

지존: 맛있으면서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요리


우리 집 남편은 중수급이다!

본인이 간단히 먹는 음식은 잘한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 특히 라면은 정말 짜게 끓이는데 아이들은 아빠표 라면을 좋아한다.

건강하게 먹을 거면 라면을 왜 먹느냐며...

엄마가 끓이는 라면은 싱겁다나? 그래서 라면을 먹을 때는 남편이 주로 끓인다. 그럴 땐 나는 꼬들한 면만 먹고 라면 국물은 먹지 않는다.

정말 짜기 때문이다.



4탄, 빨래 널기

결혼을 하고 남편은 세탁기 버튼을 눌러본 적이 없다. 내가 알기로는.

특히나 최근 드럼 세탁기로 바꾼 이후로는 더더욱.

하지만 빨래를 널어 본 적은 있다. 그것도 내가 시켜서 했지만 역시나 남편은 빨린이이다. 빨래 널기 어린이!

빨래를 걸쳐두는 것에서 끝이. 


빨래 널기에도 수준이 있다.

하수: 그냥 구겨진 채로 걸쳐둔다.

(빨랫대에 걸려있는 것으로 끝)

중수: 한번 털어서 널어둔다.

고수: 탁탁 털어 옷걸이를 이용해 널어둔다.

지존: 건조기를 사 준 다음 건조기로 옮겨 빨래를 널지 않는다. 다만 개어놓을 뿐!


우리 집 남편은 하수급이다!

"빨랫대에 걸쳐두었으니 이것으로 다했소"라고.

처음 널어놓은 빨래를 보고 놀랬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구겨진 빨래들이 그냥 걸쳐져 있었다. 정말 하기 싫었나 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자취를 해본 남편이었기에 곧 괘씸해져서 잔소리를 했었다. 이렇게 해놓으면 다시는 시키지 않겠지... 하는 속셈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흥칫뿡"이었다. 그날은 내가 다시 다 널어야 했다.

그 뒤로는 빨래의 구김이 좀 덜하긴 했지만 여전히 맘에 들진 않는다. 그래서 다른 가사에 비해 빨래 널기는 거의 맡기지 않는다. 



5탄, 립시키기

남편은 스스로 뭔가를 하기 싫어한다. 밖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고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반대의 사람이다.

우리 부부를 아는 선배들은 바깥에서 스트레스가 많으니 그렇다라며 시댁 식구들이 되어버린다. 웃으면서 그러거니~ 이해했지만 몇 년 후면 50이 되는 "나"이기에 '나도 직장맘이거든!'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시키면 그나마 군소리 없이 하는 점은 다행이지만, 집에서 TV 주도권과 소파 차지권을 쥐고 가부장적인 라떼 가장의 모습으로 지내는 점은 불만이다.

남편은 한마디로 우리 집 하숙생이다.

밥 차려주고 옷 빨아주는 하숙집에 출퇴근만 하면 되는, 세상 편한 남자!


립에도 수준이 있다.

하수: 아내가 집을 비우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중수: 아내가 집을 비워도 굶지는 않는다.

고수: 아내가 집을 비우면 스스로 집안 관리를 한다.

지존: 아내가 집을 비워도 안심이 될 정도로 알아서 잘한다.


우리 집 남편은 중수급이다!

남편은 마신 물컵과 커피를 타서 마신 컵을 항상 그 자리에 둔다. 싱크대에 넣어두던가 바로 씻어도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 내가 집을 비우면 며칠 지나지 않아 돼지책 동화책에 나오는 지저분한 집이 될 것 같다. 그 반대의 결과도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앞으로 내가 자주 시도해보면 알게 될 것 같다.

분명한 건, 라면과 햇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시켜먹으면 되기에 굶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한꺼번에 변화를 바라기보단 조금씩 교육을 시키는 중이다.

어차피 나보다 빨리 퇴직을 하면 살림을 맡아해야 하기에 이건 남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현재 남편의 수준은 하수, 중수급이나

기본 잠재력이 있는 남자라 고수의 반열에 들인 후, 지존의 경지를 바라볼 날이 오리라 믿는다.

나의 독박 탈출도 머지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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