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청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선생님
평소 기록 자아가 숨어있다가 오늘은 꼭 본인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이 외칠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블로그를 열고, 여태 묵혀두었던 사진을 정리하면서 사진 속 장면에서 튀어나오는 음성에 흠칫 놀라면서 ‘아, 그 때 그 말을 했었지.’라고 되뇌이며 텍스트화해서 블로그에 기록한다.
하지만 단순히 나의 이야기만 기록하는건 아니고 오며 가며 지나가던 낯선 사람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기록한다. 이렇게 지극히 모르는 이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내가 기록해도 되는가에 대해 윤리적인 고민도 했었지만, 어차피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니까 내 블로그에 맘 편하게 쓰기로 했다. 최근에 오마카세를 즐기러 간 자리에서 셰프와 앞자리 손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11년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 손님과 9년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 셰프는 동질감으로 똘똘 뭉쳐 번호를 주고받으며 서로 할 이야기가 많겠다는 넋두리를 했다.
‘엿듣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듣지 않으려 노력해도 들리는 이상한 병이 있다. 가끔 이 능력이 내것에 온전히 집중을 해야할 때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선풍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도 거슬릴 만큼 소리에 예민하긴 하다. ‘아, 또 들려······.’
하지만 여태 살아온 대부분은 이 능력이 주변 기류를 빠르게 캐치할 수 있게 해주며 다양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해서 마냥 싫진 않다.
바야흐로 7년 전 대학생 때, 친구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사기꾼의 향이 다분히 나는 여자분과 앞에 40대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명이 앉아있었다. 사기꾼은 분양을 받을 수 있는 아파트에 대해 설명을 했고 보아하니 아주머니 두 분 중 한 명은 친구 관계라기 보다는 사기꾼과 한통속인 것 같은 바람잡이었다. 속으론 ‘하, 저렇게 사람이 사기를 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0명 남짓 되는 학생들에게 미술 활동을 시켜 놓으면 삼삼오오 모여 본인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미술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그들의 이야기 소리가 다 들린다. ‘오늘 학교 끝나고 편의점 가서 컵라면 사먹게 점심 먹지 말자.’ (급식줄에서 슬그머니 탈선하자.), ‘어제 불닭볶음면 먹어서 죽는줄 알았다니까. 속이 쓰려 죽겠다.’, ‘너 우리 반 친구들 중에서 누가 제일 좋아? 줄 세워봐. 아! 싫어하는 애들도 순서대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공중에 붕붕 떠서 내 귀에 꽂힌다. 그러면 아무리 본인들끼리의 수다라지만 수위를 조절해야하거나 경고를 해줘야하는 말을 하는 학생들에게 가서 ‘그래, 그래서 내 앞에서 말해 보렴.’ 이라며 눈으로 찡긋 미소를 보낸다. 머쓱 해하는 학생들을 보며 ‘선생님이 귀가 밝은 걸 어쩌겠니. 다음 학년에는 조금 무딘 선생님을 만나렴’, 이라는 말을 맘속으로 한다.
이 요상한 능력을 완전히 사랑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모든 소리가 날아와 내 머릿속까지 도달해 머리가 터지는 순간이 온다 해도 이 능력은 버리고 싶지 않은 걸. 글을 마무리하면서 느낀 건 적어도 내가 교사로 살면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건 큰 행운인 것 같다.
'복이지! 복!
너네가 만든 복 주머니에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쏙 들어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