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리칸

by 몽구

코메리칸

외할머니는 육이오 전쟁 당시,
전쟁 고아 한 명을 맡아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전쟁 세대는 아니지만
영화나 책을 통해 한국전쟁의 참상을 접하면서
왜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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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피난 행렬은
봇짐을 이고 달구지를 끌며
기약 없는 길을 걷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얀 저고리, 하얀 바지.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
아이를 안고 언 땅을 걷는 부모들.

밤이면 민가를 찾아 헤매다
빈집이 없으면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그 추위 속에서 몸을 덮을 유일한 장비는
솜이 덧대어진 두툼한 이불 한 장.
땔감도 없어
생쌀을 씹으며 하루를 넘겼다고 한다.

어떤 날은
폭격을 피해 부모가 아이를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는
홀로 남아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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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후견인이 된 그 아이.
내게는 외삼촌쯤 되겠지만,
나이 차도 없어 그냥 ‘마이클’이라고 부르겠다.

마이클은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결국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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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 3학년이던 어느 날.
미8군 소속으로 한국에 온 마이클을 처음 만났다.

그는 낯선 얼굴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닮은,
마치 인도인 같은 인상.
한국어는 어눌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말을 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말투와 태도였다.
한국을 조롱하듯 말하고,
아버지께서 준 지폐를 흔들며
“이건 돈이 아니라 종이야”라고 말하는 모습에
우리는 모두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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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대화를 하다가도
그는 "쉿, 도청된다"며
방에서 나가 달라고 했다.
그 말투 속에는
자신이 속한 나라와
내가 속한 나라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있었다.

미국.
세계 최강의 나라.
그 눈으로 본 한국은
마치 우리가 지금의 미얀마나 베트남을 바라보는 듯한
동정 섞인 무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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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나에게 여러 번 미팅을 부탁했고,
그 자리에서조차 미국식 우월감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 본 대학 새내기 여성에게
서슴없이 스킨십을 요구했고,
내가 당황하는 걸 보며 웃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거리감을 두는 거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병 걸리면 고추 자른다며?”
그리고 바지 앞에서 가위질 흉내를 냈다.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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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미국에서 마이클에게서 편지가 왔다.
회계사가 되었고, 백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식.
사진도 함께 왔다.

그 이후로는
그의 소식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편지도, 전화도,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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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어디쯤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한국을 조롱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슬픔이 있었던 걸까.
나는 가끔 그를 생각한다.
세상의 바깥에서 어른이 되었던 한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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