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 그리고 절제의 미학

by 몽구

빠, 그리고 절제의 미학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펼치면
빠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어둑한 조명 아래 흐르는 클래식,
술잔에 담긴 고독과 음악 속에서
그는 생각하고, 글을 쓰고,
때로는 스스로와 조용히 대화한다.

그의 빠는
인생의 한 페이지가 머무는 곳이었고,
글의 영감이 피어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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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우리 동네에도 빠가 생겼다.
새 건물 3층.
처음엔 스쳐 지나갔지만
술기운에 살짝 올라온 호기심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혹시 바가지 씌우는 곳은 아닐까.”
“성매매는 아니겠지?”
이런 생각이 스치지만,
나는 원래
궁금증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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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갓 오픈한 듯한 화려한 인테리어,
호텔 라운지를 연상케 하는 공간.
그리고
앵커 같은 이목구비의 미인 두 명이
부드럽게 나를 맞이했다.

부스 몇 개, 스탠드 바,
벽면에 줄지은 고급 양주들.
그곳은
외로운 밤을 채워주는 사람들의
쉼터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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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ml 맥주가 만 원.
양주는 30만 원에서 50만 원까지.
조심스레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맥주만 마셔도 되는지,
안주 없이도 괜찮은지,
사장은 자리에 없는지.

짧은 대화는
조금씩 길어졌고,
그녀들의 대화 기술은
섬세하고 노련했다.

진심은 없지만
불쾌함도 없었다.
적당한 웃음과 맞장구,
다음 화제로의 부드러운 연착륙.
그런 기술이
이 공간을 유지시키는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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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뒤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혼자였고,
비싼 양주를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단골처럼 보이는 이들의 앞엔
미인이 함께하고,
그들은 마치 드라마 속 인물처럼
폼 나게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 술은 함께 앉은 여인의 속도로
두 배 빠르게 비워진다.

내 앞의 맥주병이
어느새 여섯 개.
문득 정신이 들었고
나는 조용히 계산을 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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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빠'라는 곳은
하루키가 꿈꿨던
사유의 공간과는 다르다.

이곳은
외로운 사람들이
사람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하루의 끝자락에 들르는 곳이었다.

연인의 얼굴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없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

절세 미인의 얼굴이
뇌리에서 아른거렸지만,
나는 다시 가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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