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Fiction, 122년 조선 르네상스의 뿌리, 최동이>
한 인간이 자신의 생을 반추할 때, 아마도 자신이 통과해 온 그 시대가 가장 영광스러웠거나 혹은 가장 고통스러웠노라 말할 것이다. 타인의 삶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객관의 렌즈로 바라보면 유독 짙은 어둠이 깔린 시기가 보인다. 나에게 조선의 암흑기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네 개의 전란이 휩쓸고 간 그 처참했던 44년이다. 반대로 그 어둠을 뚫고 피어난 조선의 르네상스는 숙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122년의 재위 기간이라 믿는다. 흔히 '영·정조 시대'라 칭하지만, 나는 그 찬란한 꽃의 뿌리에 숙종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감히 '숙영정(肅英正) 시대'라 부른다.
나에게 숙종은 정치공학의 천재였다. 영조는 탕평과 절제의 천재였다. 그리고 정조는 개혁과 소통의 천재였다.
이제 나는 그 122년 대서사시의 출발점, 가장 낮은 곳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숙종의 여인, '최동이'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4월 26일은 ‘최 씨를 숙원으로 삼도록 명하다(命崔氏爲淑媛)’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사인 실록은 이들의 만남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당시의 비사를 담은 <수문록(隨聞錄)>은 더 극적인 장면을 전한다.
“한밤중에 궁궐을 거닐던 숙종은 조명이 유독 화려한 어느 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이 방 안을 몰래 엿보니, 웬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숙종은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렇게 최 씨와 숙종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짧은 기록만으로 임금과 무수리의 인연을 설명하기엔 한없이 부족하다. 임금이 엿보는 광경, 최동이를 궁녀라고 한 점 등이 자연스럽지도 않고 사실도 아니다. 또 야사에서는 최동이를 천민출신 무수리라고 하나, 내가 아는 동이의 아버지는 최효원으로 전옥서의 참봉이었다.
나는 역사의 기록과 기록 사이를 오가며 그 사이 비어있는 고리, 부실한 고리를 찾으려 한다. 그리하여 숙종의 환국정치를 마감하고 영조를 낳아 '숙영정 시대'를 이끈 위인, 최동이부터 재구성하려 한다.
환국의 불길을 끈 '민초의 연기'
숙종 초기는 당파 싸움이라는 이름의 '환국'이 불길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양반들의 명분론과 권력 투쟁에 지친 숙종이 마주한 것은 화려한 분내가 아닌, 세답방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장작 연기 냄새'였다. 최동이는 그 연기 속에서 권력이 아닌 '민생'을 상징했다.
숙종이 무수리 동이에게 매료된 것은 단순한 미색이 아니라, 정쟁에 지친 왕이 비로소 마주한 백성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조선 르네상스를 지탱할 심리적 뿌리가 되었다.
122년 혈맥의 설계자, 무수리 어머니
숙종이 대동법을 확대하고 상평통보를 유통하며 경제적 기틀을 닦았다면, 그 혜택이 닿아야 할 낮은 곳의 목소리를 영조에게 가르친 이는 어머니 최동이였다. 영조의 '탕평'과 '위민정치'는 결국 어머니의 낮은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숙빈 최 씨는 단순한 후궁을 넘어, 조선 르네상스의 '정신적 설계자'였다. 숙종의 강한 왕권과 동이의 따뜻한 성품이 만나 영조라는 거인을 탄생시킨 것이다.
17년의 인내가 만든 '말이 되는' 기적
무수리로 보낸 17년, 그리고 주인을 잃고 보직도 없이 버틴 4년의 시간. 사람들은 그녀가 버려졌다 했으나 동이는 그 시간을 통해 '변치 않는 가치'를 증명했다.
숙종이 그해 4월 22일 밤(인현왕후 생일 전날) 동이를 선택한 사건은 개인의 로맨스를 넘어선다. 그것은 조선의 왕권이 당파(양반)를 떠나 드디어 백성(무수리)과 손을 잡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말이 되는 픽션'이야말로 122년 태평성대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병오년에 쓰는 출사표
최근 나는 AI를 활용해 자료를 수집하며 책상 위에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불가능했을 세밀한 고증들이 시대의 변화 덕분에 가능해졌다.
창경궁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오른 이름 없는 무수리의 아궁이 연기. 숙종은 그 매캐한 흔적 속에서 조선의 내일을 보았고, 그 연기를 마시며 자란 아이는 훗날 영조가 되어 탕평의 길을 열었다.
이제 본격적인 불꽃을 지피기 전, 오늘은 그 찬란한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불씨 하나를 이곳에 먼저 심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