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임대에 저당 잡힌 희망, 희망을 거세당한 청년들

현대부동산 우화

by 서점직원

2000년대 후반. 친구를 따라갔던 강북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이 사는 곳을 소개한 K군.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이 제게는 강렬했고 또 꽤나 생경했습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저당 잡힌 희망

10-1.jpg 사진출처 - 네이버 캐스트

1990년, 판자촌 철거민들의 안정적인 주거를 돕기 위해 지어진 영구임대아파트.

30대, 이른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어린 두 아들과 함께 극빈층으로 추락하여 월세방을 전전하다 모자가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한 옆집 김씨 아줌마 /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다가 88 올림픽 도시 정비 사업으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얻은 옆 동 최씨 아저씨

저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처럼 영구임대아파트 역시 세대수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사연이 존재합니다. 영구임대 아파트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시끌벅쩍한 출퇴근길의 풍경, 생기 그리고 희망입니다.


영구임대 아파트는 일정 수입이 넘어가면 임대아파트 거주조건이 상실되고 소득이 높아지면 임대료가 상승합니다.


- 거주조건 : 2020년 기준 월소득 2인 218만, 3인 281만 / 3인 기준 월소득 420만 초과 시 재계약 1회 가능

- 임대료 :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50% 초과 시 (3인 281만) / 5~10% 초과 시 20% 할증, ~30%까지 40%, 30% 초과 시 80%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임대료가 올라가고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나게 되는 구조죠.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아무도 돈을 많이 벌려하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영구임대아파트 거주조건을 박탈당하고 정글 같은 바깥세상에 떠밀려 주거 난민이 되느니 돈을 조금만 벌더라도 안정적으로 영구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영구임대아파트의 안락함에 취해 주거안정을 얻은 대신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저당 잡힌 사람들.

영구임대아파트가 낳은 또 다른 사회의 단면입니다.


다행히 K군은 노오력하여 많은 돈을 번 끝에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퇴거당했습니다.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보기 드문 개룡남이 된 건데요. K군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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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내 주민 중 하나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가스폭발로 자살 시도를 한 것이죠.

그때를 회상하며 K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가스폭발로 자살시도를 하는 옆집 주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전세난민이 되었지만 K군은 자신의 미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을까요?




내겐 너무 좁은 행복주택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습니다.

"형 나 행복주택 당첨됐어"

20191208_145311.png 행복 주택의 임대조건 / 보증금 3천백9십만원에 월 임대료 12만2천원

소득 270만원 이하이며 물려받은(혹은 받을) 재산이 없고 (형처럼) 흙수저였던 동생은 운이 좋게도 처음으로 응모한 행복주택에 한방에 당첨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낡은 빌라와 다가구를 전전하며 살아온 동생은 보증금 3천에 월 10만원이라는 저렴한 임대료와 처음 살아보는 신축, 단지 내 커뮤니티 시설에 몹시 기대가 큰 듯 들뜬 목소리였습니다.


이어지는 동생의 말

"형 근데 전용 14가 뭐야?"

'전용 14라고? 이 자식은 몇 평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지원한 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20191208_150605.png 행복주택 전용 14A의 조감도

동생이 건넨 입주자 모집 공고 팸플릿에는 전용면적 14.8, 4.3평에 화장실과 주방, 베란다가 오밀조밀 배치된 평면도가 있었습니다. 전용면적 14라니... 전용면적 39에 혼자 살면서 좁다, 이사 가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사는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고시원보다는 약간 넓고 원룸보다는 약간 좁은 4.5평이라는 공간. 싱글 침대 하나 놓기도 비좁은 사이즈. 다행히 동생은 물욕이 전혀 없는 미니멀리스트라 짐을 어디다 두어야 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퇴근하고 누워 맥주 한 캔 까면서 넷플릭스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동생의 가장 큰 재산인 50인치 티브이. 평면도를 이리저리 뜯어봐도 침대에 50인치 티브이를 두기에는 공간이 애매했던 거죠. 결국 침대를 포기하냐 티브이를 포기하냐 양자택일의 선택 사이에서 고민 중인 동생.


또래들이 욜로에 플렉스를 외치는 동안 돈 안 드는 취미라며 큰맘 먹고 대형 티브이를 구매했던 동생은 행복주택에 입주하기 위해 티브이를 처분해야 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싱글 침대에 대형 티브이라는 소박한 꿈마저 허락하지 않는 행복주택. 거세당한 취미마저 또 거세당할 위기에 놓인 동생을 보고 있노라니 팸플릿에 적힌 1인 가구를 위한 실용위주의 공간설계라는 문구가 저에게는 덧없이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라에서 정한 전용 14

닭장 속에 갇힌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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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교통부가 2011년 정한 최저 주거기준에 따르면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은 전용 14(약 4.2평)입니다. 이마저도 종전 12㎡였던 것을 2011년 2상향하여 현재 14㎡가 된 것이죠. 행복주택은 국토교통부에서 정한 이 최저 주거기준을 근거로 지어집니다. 문제는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주거면적이라고 나라에서 정한 기준이 행복주택 공급의 평균 주거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죠. 정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토지와 예산이라는 경제논리 혹은 행복주택 00만 채 공급, 임대주택 보급률이라는 눈에 보이는 수치에 집착한 나머지 뒷짐진채 수수방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cc53e55bc2e8a360e631e9571a1ed86d.jpg 2019년 국토교통부 주거 실태 조사 (출처 : 비즈니스워치)

2019년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 가구의 1인당 평균 면적은 27.9㎡로 조사되었습니다. 현재 청년 임대로 제공되는 행복주택보다 약 2배가량 넓은 면적이죠.


ju.png 국토교통부 조사 주요국의 1인당 주거면적 조사

국토교통부에서 조사한 주요국의 1인당 주거면적 조사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주거면적은 작은 편입니다. 가뜩이나 작은 면적 중에서 행복주택은 그 절반도 안 되는 면적을 강요하고 있는 처지죠.


1.JPG 2017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 / 공공임대주택 입주의사

국토교통부 주택 이외 의거처 주거실태조사에서 공공임대주택 입주의사 (2017년 조사)입니다. 재밌는 점은 월소득 100만 원 가구가 공공임대 입주의사가 없다고 답변한 비율이 57.8%, 1인 가구의 51.8%가 공공임대주택에 입주의사가 없다고 응답한 건데요. 소득층, 1인 가구가 원하는 주거형태와 나라에서 짓고 있는 행복주택과 괴리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조사입니다.


seoul.png 서울의 모 행복주택 단지 배치도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이 부족하니 면적이 조금 작더라도 많이 지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하는 게 맞지 않겠냐'라고요. 서민을 위한 적정 수준의 주거용 건물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겠다는 미명 하에 닭장처럼 지어진 소련의 서민아파트 흐루쇼프카(хрущёвка)가 오버랩되는 건 단순히 저만의 착각일까요?




희망을 거세당한 청년들


2020년 현재 행복주택의 입주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학생, 취준생 : 본인과 부모님의 합산 월소득 562 이하 (3인 기준) / 본인 자산 7800 이하 / 본인 자동차 X

청년 : 본인 월소득 211 이하 / 자산 2억 8000 이하 / 자동차 2499 만원 이하


대학생과 취준생은 행복주택에 입주하기 위해 차를 가져서는 안되고 청년들은 행복주택에 입주하기 위해 월 211만 원 이하를 벌어야 합니다. 그마저도 6년까지만 거주가 가능하죠.

얼마간의 주거안정. 좁지만 신축, 저렴한 임대료에 살기 위해 취향을 거세당하고 행복주택을 선택하느냐 /주거불안과 높은 전월세. 낡지만 넓은 면적에 살기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히고 민간임대주택을 선택하느냐

청년들은 똥맛 카레냐 카레맛 똥이냐라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 수입차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카르페디엠, 욜로가 청년들의 대세가 된 것은 어쩌면 희망을 거세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집값이 너무 비싸니, 내 명의의 집 한 칸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미래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으니 현재의 삶을 즐기자는 것. 희망은 거세당했지만 취향만큼은 거세당하지 말자는 것. 그것이 욜로가 현재 20~30대 청년들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은 씁쓸한 단면입니다.


정부가 바라는 건 청년들의 행복한 삶일까요? 좁은 닭장 속에 그들을 밀어 넣고 임대아파트 공급 13만 호를 언론에 대서특필해가며 청년들의 행복을 자신들의 치적으로 등가 교환하는 것일까요?


국가는 청년이 나라의 미래라고 합니다.

앞으로 나오는 부동산 대책은 천편일률 적이고 좁아터진 닭장 공급이 아닌 청년들이 미래를,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그런 대책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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