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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 Sara Nov 18. 2021

당신은 지금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던져놓고 생각해보니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대답을 내놓질 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정정해서, 질문의 난이도를 조금 낮춰보자.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꿈. 참 흔하면서도 선뜻 무언가로 정의할 수 없는 단어다. 누구나 어릴 때 이 질문을 받고 자랐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때가 있었다. 더 어린아이일수록 막힘이 없다. 거리낌 없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꿈이 쉽게 바뀌기도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는 그만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겠지. 그런데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사춘기 무렵의 아이들만 돼도 쉽게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꿈이 없노라 무덤덤히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를 성인으로 규정짓는 나이가 되면 비로소 그 질문에서 해방(?)된다. 아무도 다 큰 어른의 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꿈을 가지고 있을 거라 잘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꿈을 이룬 곳일 거라고, 즉 꿈이 현실화된 자리라고 단정 짓는다. 또 다른 부류가 있다. 꿈꾸는 것을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누가 꿈꾸는 대로 사느냐, 다들 현실에 맞춰 살아간다 이야기한다. 꿈은 그냥 철부지 시절의 이야기라 치부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어느 부류에 속해 있건, 꿈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건 확실하다. 



나도, 꿈이 있었다. 아주 오랜 시절부터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글을 쓰는 작가도 되고 싶었다. 그런데 2004년 11월 어느 날,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쓰리고 아프게 기억됐던 그 어느 날.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던 그날. 내 꿈은 사라졌다. 너무 떨리는 마음에 시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고 결과 역시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재수를 해서 이 끔찍한 날을 한 번 더 겪을 용기조차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그나마 커트라인 높은 과를 가고 싶어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전공을 선택했다. 법대생이 되었다. 내 꿈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접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면서 교직이수를 신청했다. 적어도 교사가 되기 위한 자격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1년에 몇 명 뽑지도 않는, 비인기 과목 임용에 덜컥 도전할 만큼 용기 있지 못했다. 그렇게 내 꿈은 실패했다, 고 여기고 내가 속할 수 있는 그 어딘가를 향해 여기저기 헤매었다.



무엇 하나 진득하니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내 적성은 뭘까?'에 대한 고민으로 20대를 보냈다. 휴학하면서 공무원 시험도 잠깐 준비했다가 10개월 정도 영어를 공부하고 테솔도 수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교육대학원에 가려고 영어강사를 하며 학비를 모았다. 그런데 어디 인생이 내 맘대로 흘러가던가? 대학원에 가긴 갔는데 교육학이 아닌 언어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계속 내 꿈을 찾아 달렸는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엄마의 자리에 서고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다시는 꿈을 꾸지도, 꿈을 향해 달리지도 못할 줄 알았다.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계속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현재, 지금의 나로 돌아와 이야기해보자면 내 생각은 틀렸었다. 꿈을 찾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노력해왔지만 그건 모두 잘못된 질문들이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저자인 에릭 와이너가 그랬다. 우리는 너무 자주 질문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말이다. 상대를 저격하고(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자신을 저격한다(왜 난 제대로 하는 게 없지?). 질문으로 변명을 삼고(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중에는 정당화한다(내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되었으니 올바른 답을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예전에는 꿈을 꾸면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보통) 단 한 가지뿐이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으면 교대나 사대에 진학해서 임용고시를 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교대 진학에 실패했을 때, 스무 살의 나는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굳이 학교 현장이 아니더라도 내가 가진 무언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오랜 기간 객관식 시험문제를 풀고 정답이 하나인 것에만 익숙해졌던 우리는 인생의 답도 단 하나뿐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어쨌든 학교 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가르치는 자리에서 계속해서 얼쩡거렸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오랜 기간 섬겼고,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정말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얼 해도 이것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 아직도 어린아이들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진 못했지만, 이 발전된 세상에서 SNS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보고 싶지만 어려워하는 엄마들과 함께 영어책을 읽고 있다. 그분들이 영어의 재미를 알아가고, 조금씩 단계를 높여 원서를 읽어나가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사라쌤'이라고 불러주는 분들도 계신데 그 단어가 그렇게 정겹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내가 좀 더 잘 알고 있는 것을 전달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교사가 되는 것은 하나의 옵션일 뿐이지 정답은 아니었던 것이다. 작가의 꿈은 또 어떤가? 책을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꾸준히 글을 쓰고 올리다 보니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지금처럼. 언젠가 작가가 될 그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 선택지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선택지를 택하면 될 일이었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때 내가 잘못된 질문으로 나를 공격하지 않고, 더 나은 질문을 했다면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대신에 '어떤 걸 더 해볼까?'라는 질문으로 날 다독이고 위로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던 시간조차도 내 선택에 확신을 갖게 해 준 나의 자산이 되었지만 조금 더 시간을 아낄 순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잘못된 질문으로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당신의 꿈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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