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준 시간
한동안 루틴에서 멀어진 생활을 했다. 백신을 맞고 한참을 앓고 났더니 체력이 무너져 있었고, 작년 겨울부터 쭉 이어오던 새벽기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만 무리하면 몸에서 신호가 왔다. 더 이상 달리면 안 된다고, 네 몸은 그걸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잠시 멈춤의 시간이었다. 들쭉날쭉 등원하며 가정 보육하는 날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새벽은 내가 오롯이 혼자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급하지 않은 것부터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빡빡한 계획을 가지고 시간을 알차게 보내지는 못했지만 내 하루는 더욱 심플해졌다. 가장 소중한 것들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고 바쁘게 살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해지는지 깨달았다. 얼마 되지 않는 자투리 시간에도 내가 내려놓지 않고, 꾸역꾸역 끝까지 붙잡았던 것들이 바로 그 답이었다. 가벼워졌다. 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 꼭 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들,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 했던 것들을 내 인생에서 빼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삶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해졌다. 그리고 이제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알겠다.
사실 모든 과정이 이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원래 지나간 시간, 추억은 미화되는 법이니까. 우리는 좋은 것만 기억하는 편이니까. 내가 원해서 가진 시간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한참 뒤처진 출발선에 시작했기에 쉬지 않고 달려도 부족했다. 더 달렸어야 했다. 멈춰 설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프고 말았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지만 또 가끔은 날 또 미치게도 만들었다. 그냥 잠깐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인 것인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유지해온 루틴들인데 하나씩 빼나가려니 속이 쓰려왔다. 역시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인가 자책도 해보았다. 그저 하릴없이 지나가는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내 안은 보이는 것처럼 평화롭지 못했다. 내 마음은 욕심과 현실 사이에서 벌어진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애써서 견뎌왔다. 쉬어야만 하는 시간을 부정해가며. 그러다 보니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상흔이 남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 이거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나한테 필요한 시간이었구나?
멈춰 서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기 위해 멈춰야만 할 때가 있다. 그 옛날 지혜의 왕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Late Bloomer. 내 블로그 닉네임이다. 늦게 꽃피우는 사람. 이 단어가 얼마나 내게 위로가 되었든지. 사람은 저마다 아름답게 꽃피우는 시기가 있다. 그 사람의 때. 그 사람의 시간. 그리고 그 꽃을 위해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도 저마다 다르다. 카르페디엠,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숨이 차도록 힘껏 달리고, 멈춰야 할 때가 온다면 그 쉼의 순간을 마음껏 누리자.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에 애쓰지 말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 에릭 와이너가 한 말이 강제 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에 서 있는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지나오고 있는가? 호흡을 가다듬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잠시만 견뎌내보자. 과도기를 지나고 내 삶의 흐름을 바꿔주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 그리고 나면 미래의 멋진 나와 손잡는 그날이 곧 올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