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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 Sara Feb 17. 2022

괜찮다는 거짓말, 이 아닙니다

진짜 어른이 되어버렸네.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객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0대 후반을 향해가는 나이를 받아들고서도 나는, 아직도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꿈꾸었던 어른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도 보잘것없어 보이고 미성숙한 모습이 아니었단 말이다. 어른이 되면 좀 더 성숙해지겠지. 어른이라면 좀 더 능력 있고 여유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겠지. 아니, 모든 걸 다 차지하고서라도 어른이 된 나는 내 눈에도 멋져 보이겠지, 같은 소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루기 힘든 꿈을 꾸고 있었나 보다. 지금의 내 모습을 어른으로 인정하자면 내 인생의 실패를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30대의 나는 20대 때의 나처럼 돈을 벌지도 못했고, 그때만큼 척척 남을 돕지도 못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베풀면서 살았던 때도, 어려운 이의 형편에 공감해 주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누가 봐도, 사회적인 어른인 된 나는 왠지 쪼잔해 보였다.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들다가도, 건너건너 누구의 경조사를 챙기려다가도. 이게 내가 챙길만한 것인가? 내가 그만큼 받았던가?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게 되었다. 이 돈이면 우리 애들 뭐 더 하나라도...?라며 셈을 하게 되었다. 순수했던 마음마저 잃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착한 아이라서, 잘 자란 아이라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 둘을 키우는 지금의 나처럼, 우리 애들 먼저 챙기려고,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쪼잔함을 자처하고 나에게 용돈을 쥐여준 부모님. 그런 부모님에게 기대어 살았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나 싶다. 부모님의 돈으로 베푸는 호의, 부모님의 능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자유롭기 힘들다. 돈도, 사회적 지위도, 그 어느 것도 내려놓을 수 있다며 어디든 보내달라고 기도했던 20대 청년은 이제 작은 것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의 대수롭지 않은 기침 소리에도, 살짝 나는 미열에도 가슴 덜컥 내려앉는 쫄보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었다. 그냥 나이만 먹었지, 어른은 아니야. 아직도 나는 자라고 있어. '어른이'. 우리는 모두 성장해가는 중이야.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좋았다. 그렇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책을 읽었다. 그것이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미성숙한  모습에 대한 미봉책이 되어주었으므로. 알면서도 내내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른이라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평일도 인생이니까>라는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엇보다 빅 픽처 이론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지점은, 인생의 ‘완성’을 가정한다는 데 있다. 현재를 완성된 삶을 위한 어떤 ‘단계’로 보는 한, 우리는 영영 미완성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자기 계발서를 읽고, 똑같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똑같은 메인 뉴스를 보고, 똑같은 성공 병을 앓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인생은 ‘발전’돼야 하는 것이고, 자기는 ‘계발’돼야 하는 거라고.

그런 세계에서 오늘의 나는 늘 좀 더 노력해야 하는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지금의 삶은 아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미진한 단계일 수밖에 없었다. 빅 픽처는 인생에 큰 기대를 걸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주 실망하고 만다. 그럼 작은 기대를 걸고 자주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걸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삶은 게으른 삶인가? 꿈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걸까? 인생에서 꼭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만 할까?


'성장판 닫힌 지도 오랜데 언제까지 성장하라는 건지 모르겠고, 그런 식이라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다 최고의 자신으로 죽겠네. 그것참 근사하네......'라고 꼬인 채로 좀 생각을 해보았다는 글귀를 보고 그냥 너무 재미있다며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는데 이 문장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정말 그런 것이 아닌가! 내가 뭐라도 좀 큰일을 할 것만 같고, 아니 해야만 하고! 그런데 그 대단한 것을 하지 못하고 빅픽처 안에 속하지 못한 나는 늘 부족한 단계인 것. 그래서 나는 나를 좀 더 혹독하게 단련시키고 계발되어서, 발전된 모습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 지금의 나는 완성된 나를 위한 저 아래 계단 어딘가쯤. 어른이 되려면 올라가야 할 계단들이 아직도 한참은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안의 어떤 새로운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꽤, 자아성찰을 잘하는 편인 줄 알았는데. '자기 객관화'를 좀 잘 해보라는 남편의 농담 같은 진담이 실제로 이루어져 버렸다. 조금씩 갈라져 보이던 그 틈 사이로, 곡괭이를 세게 내리친 것처럼. 그렇게 균열이 일어났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은 참 오랜만이었다. 아, 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래서 나는 이렇게 자랐구나. 비어있던 인생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모른 척 넘겨버리고 싶은 내 모습도 있는 법이다. 지난날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한 부정? 회피? 또는 원망?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올바른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불편한 진실을 감당하기에는 어렸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서른이 훌쩍 넘어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나는. 한바탕 실컷 울고 쏟아낸 뒤 흘려보낼 줄 알게 되었다. 1+1=2, 내게 있어서 지금의 이 일은 딱 이 정도의 의미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고작 1 정도 밖에 안 되는 상처에도 열 배, 백배, 천 배는 부풀리고 상처를 위한 상처를 받는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이제까지 쌓아둔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돼버린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마냥 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에게 주어진 상처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 상처 따위는 받지 않는 강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철철 흐르는 피를 무서워 쳐다보지도 못하고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던 꼬꼬마가 이제는.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꾹 눌러 지혈한 뒤에 후시딘 발라 입으로 호호 불어주는 정도. 딱 그 정도는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준 사람에게도 한 줄기 연민을 보이고 먼저 손을 내밀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런 부분에서 부족한 것처럼, 저 사람도 저런 부분에선 부족하구나. 완벽한 인간은 없구나. 가끔은 다듬어지지 않은 모난 부분들이 서로를 할퀴고 상처를 내어도 이 또한 배움의 현장으로 삼는 것이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미움이 나를, 내 인생을 갉아먹지 않도록 나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와 싸우고 이 세상의 고통은 다 짊어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집을 뛰쳐나가는 사춘기 소녀 같은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let it be' 슬플 땐 마음껏 슬퍼하되, 내 안에 오래 간직하지는 않는 것.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두는 것. 이것이 어른으로서 가지게 된 축복, 삶의 연륜이자 지혜이다. 절대 꽁으로 나이 먹지는 않는다는 말처럼, 지나온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내가 10대, 20대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 지금의 나이에서는 가능해졌다. 그렇다, 정말 어른이 되었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모습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견뎌온 시간들이, 크고 작은 경험들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대에 못 미친 실망감에 나오는 그저 그런 자기 위안도, 현실도피도 아니다. 그렇기에...





괜찮다는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꽤 괜찮다. 우리는 정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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