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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 Sara Apr 28. 2022

매일 저녁 연필을 깎습니다

정갈한 삶의 태도를 배우도록


연필을 졸업한 지 한참이 되었다. 고학년의 상징이었던 샤프.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연필을 사용하던 친구들은 자연스레 하나 둘 샤프로 넘어갔고, 나도 그 대세에 따랐다. 그 뒤론 연필을 잘 찾지 않았다. 물론 돈을 주고 사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정리를 하느라 여기저기 뒤엎는 날이면, 꼭 어딘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곤 했다, 연필은. 이제 더 이상 쓰는 사람도 없는데 주인 잃은 그 연필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발견될 때마다 작은 통 하나에 모아둔 연필들은 내가 책을 더럽게(?) 읽기 시작하면서 가끔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책이 아까워서 밑줄 하나 긋는데도 덜덜 떨던 내가 마음을 바꿔 책에 흔적을 남기기로 마음먹고 나서 좋은 도구가 되어 주었다. 칠하고 나면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릴 수 없는 형광펜이나 색연필보다는 언제고 다시 지울 수 있는 연필이 좋았다. 갱지로 된 원서를 읽는 날에는 더 유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입학을 했다. 여느 초등학교 1학년과 마찬가지로 가방에는 L자 파일, 종합장, 필통. 그리고 필통 안에 든 연필 네 자루. 입학과 동시에 아들에게도 연필과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3월 첫 한 달은 내가 신입생이 된 듯 밤마다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기기 바빴다. 자러 가기 전에 아이 필통을 확인하고 닳은 연필은 새로 깎아 넣어두었다. 혹시라도 빼먹은 것이 있을까 싶어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즈음 <부모는 관객이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나중에 재독을 하고 제대로 리뷰를 남기고 싶어 아껴뒀을 만큼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늘 책을 읽고 나서 적용점 한가지(원씽)를 찾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 책의 원씽은 아이가 혼자 책가방 챙기게 하기였다. 그 뒤로는 밤에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자기 스스로 학교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아이의 루틴이 되었다. 내일 학교에 입고 갈 옷을 골라 꺼내 두고 수업 시작 전에 읽을 그림책을 한 권씩 챙긴다. 그리고 나서는 필통을 꺼내 연필을 살펴본다. 부러지거나 다 써서 닳은 연필이 있으면 꺼내서 깎은 뒤에 제자리에 넣고 나면 준비 끝. 이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그럼에도 늘 물어서 아이의 짜증을 유발하지만) 아이 스스로 척척 잘 해낸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혼자 연필을 깎고 있다. 




매일 밤 아이가 연필을 깎고 다음 날을 준비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참 흐뭇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아이는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자기 물건을 아끼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아침에 급하게 허둥대지 않고, 다가오는 시간을 미리 준비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물건, 내 시간을 운영하는 방법을 배운다. 도움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해 나가는 법. 이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 아이의 삶이 될 테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삶의 태도'를 가르쳐주고 싶다. 바르게, 정갈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인생을 바르게 대하는 자세를 물려주고 싶다. 




이렇게 매일 연필과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몽당연필이 되어 더는 쓸 수 없을 만큼 소중하게. 연필을 아끼고 아껴 쓰던 어린 시절 엄마의 그 마음을.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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