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반성문
지난 3월 말 둘째 어린이집에서 퇴소했다. 사실 말이 퇴소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작년 3월에 입소해서 코로나 때문에 가다 말다를 반복했었다. 어쩌면 가지 않은 날들이 많았을 첫 기관 생활. 12월 즈음부터는 아예 나가지 않았었고 1월에 잠깐, 며칠 등원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는 사이 확진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퇴소! 어린이집에 적을 두고 있으나 없으나 똑같은데 가정 보육 신청하고 10만 원이라도 더 받자. 그래서 퇴소하겠단 연락을 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가지고 놀 자석 블록을 질렀다. 그 10만 원이 내 통장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차라리 매달 받는 그 돈으로 아이와 함께 놀 교구나 책을 사기로 했다. 오빠 것을 물려받거나 함께 쓰는 것들이 많은 둘째에게 온전히 내 것을 가지는 기쁨도 누리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첫째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둘째와 찐한 시간을 보내자 다짐했던 나의 거창한 포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 들고 말았다. 그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에 나는, 너무도 바빴고 체력도 뒷받침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둘째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첫째 아이와 함께이거나, 내가 힘들까 봐 도와주러 달려온 친정 엄마와 늘 함께였다. 그래서 이 아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나 보다. '첫째에 비해 샘이 많네.' '첫째하고 달리 이런 것엔 관심이 없네.' '첫째는 안 이랬는데 얘는 이러네.' '오빠 하는 건 다 해보려고 하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육아의 모든 기준은 첫째였다. 그리고 FM인 첫째는 크게 속 썩이는 일 없이, 엄마의 말을 잘 들으며 자라왔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둘째에게는 맞지 않는 방법일 뿐이었는데 그 방법이 아니라 아이를 문제 삼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서 키우는 동안 힘들었구나. 한참 힘들었을 때에 나 얘랑 좀 안 맞는 것 같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구나.
첫째와는 집에 둘이 있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책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나마도 한글을 일찍 뗀 아이 덕분에 좀 크고서는 읽어줄 일도 잘 없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가 하고 싶은 일, 독서를 하면 그만이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아이 둘 가정 보육하느라 너무 힘들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사실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 죽어라 싸우다가도 둘이 함께 오손도손 놀곤 했으니까. 그래서 가정 보육 중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 자기계발 관련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퇴소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올 한 해 집에서 열심히 놀아주다가 내년쯤에나 보내볼까? 하는 막연한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둘째와의 시간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둘째는 집에서 가만히만 있는 아이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고, 그곳에서 더 활기차다. 그래서 매일 아침 놀이터에 나가 놀려니 내 체력이 그만큼 버텨주질 않는 거다. 아이에게 잘해주리라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오늘은 날이 흐리네, 오늘은 바람이 너무 부네 같은 어설픈 핑계로 어떻게든 나가보지 않으려는 꾀부리는 엄마만 남았다. 집에서 잘 놀아주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할 일이 자꾸 눈에 띄는지. 아이에게 혼자 놀고 있으라고 방치하기 일쑤였다. 같이 놀고 있는 시간에도 아이가 원하는 블록놀이, 역할놀이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첫째와는 해보질 않았으니 둘째 엄마이면 무엇 하나. 모든 것이 새로울 뿐. 첫째 때처럼 잘하지 못하겠으면 육아서를 뒤적여볼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제 아이는 일어나면 '심심하다'라는 말부터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인데 왜 오빠는 학교에 가고 자기는 어린이집에 못 가는 것이냐 묻기도 하면서, 등원하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놀이터에서 어린이집에서 놀러 나온 아이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쭈뼛쭈뼛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해 주위를 배회하기만 하다가 겨우 용기 내서 같이 미끄럼틀을 타고 논 것도 잠깐.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내내 아쉬워하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첫째 이맘때쯤엔 이런 것들에 아쉬워하지 않고 집에서도 즐겁게 보냈는데, 이 아이는 다르구나. 친구를 만나고 싶고, 나가서 활동하고 싶어 하는구나. 이거 서로에게 못할 짓이구나. 작년에 어린이집에 간 첫날부터 낮잠까지 다 자고 올 정도로 기관 생활을 좋아하는 아인데. 그렇게 다음날 바로 근처 어린이집 상담을 잡았다.
"우리 ㅇㅇ가 가장 잘하는 것은 뭐예요?" 상담 중에 던진 원장님의 질문에 부끄럽게도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애가 뭘 잘 하지...? 첫째라면 몇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요. 늘 오빠랑 비교해 보기만 했지 그 자체만으로 바라봐 주질 못했었네. 어린이집 등록 서류에 적힌 질문들을 보면서도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어느 하나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둘째라고 너무 대충, 마음 편하게 키웠네. 나랑 정말 안 맞는다고만 생각했지, 부리는 애교를 귀여워할 줄만 알았지 진정으로 사랑해 주지 못했구나. 너에게 온전히 집중해 주지 못했구나. 미안한 마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랑고백하고 얼굴을 부비는 너인데. 샘내는 것이 그만큼 관심을 주지 못한 엄마 잘못인 줄 모르고 네 탓만 했구나. 그러는 사이 이만큼 커버렸구나.
늘 퍼주고도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라는데 퍼주는 것조차도 못했었나 보다. 오늘 아침은 걸어서 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자유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몇 번이고 버스 태워보내려고 했던 못된 엄마에게, 엄마랑 같이 걸어서 가는 것이 좋아서 그랬다는 말로 대답하는 아이. 어쩌면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가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전부이므로. 잊지 말아야겠다, 전부를 주는 이 아이의 사랑을. 둘째라고 대충 하지 않아야겠다, 첫째의 동생이 아니라 아이 그 자체이므로.
여러분의 둘째는 안녕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