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에서 영어책읽기를 즐기게되기까지.
나에게도 분명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문법 공부. 알아들을 수도 없던 낯선 용어들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 그리고 긴장해서 듣던 영어 듣기 시험 시간. 수능이 끝나고 이제 더 이상 영어와 만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취직을 위해선 토익 점수가 필요하다 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자니 또 필수 과목에 떡하니 영어가 붙어 있었다. 다른 과목은 어찌 좀 해보겠는데 영어는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를 공부하는 데 사용했다. 'Be 동사'와 '일반 동사', 그리고 1 형식부터 5 형식 문장들. 배우고 또 배워도 돌아서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면 백지장이 되는 것만 같던 순간들. 늘 자신이 없던 지난날의 내 모습.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원서 읽기 모임의 멤버들에게 이야기하면 믿지 못하는 눈치지만, 나도 그들이 말하는 영알못 중의 하나였다. 물론 지금도 엄청난 실력과 내공을 가진 사람들에 비하자면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수준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때와 지금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영어를 대하는 내 태도다. 이제 더 이상 무섭거나 힘들지 않다. 영어가 재미있다. 늘 바라보기만 했던 너였는데 이제 조금 격 없이 친해졌다고 해야 할까?
다들 사회에 나와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더 이상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영어와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때의 나처럼. 그런데 아이를 낳아보니 또 다르다. 살아가는데 영어가 필수라는데, 영어를 잘해야 성공한다는데. 성공까진 아니더라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데. 우리 아이는 나처럼 영어를 무서워하지 말았으면, 좀 유창하게 했으면. 누구나 다 그런 바람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이가 읽어달라고 가져오는 영어 그림책이 부담스러워지고, 그렇게 발음하는 거 아니라고 타박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모습. 엄마표 영어를 해주고 싶어도 엉터리 내 발음이 우리 아이 발음에 영향을 미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엄마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시험 성적만을 강조하는 너무 억압된 환경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그 속에서 영어를 즐기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이들이 모국어로 읽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적어도 9000시간 이상 필요하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영어 학습에 필요한 임계량이 원어민과 함께 학습하는 영어 교과 시간 기준으로 계산해 4300시간 정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제시하고 있는 총 영어 교육 시간은 730시간이다.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임계량과 비교하여 보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노출 시간이다. 그러니 학교 수업만으로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목표인가'(영어책 읽기 공부법 中에서). 그런데 학교와 사회에서는 고작 이 정도 노출 시간을 가지고 시험을 보고, 완벽함을 요구한다. 그러니 우리가 영어를 즐기지 못하고,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어주기에 앞서, 엄마가 즐겁게 먼저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엄마가 먼저 즐거운, 영어책 읽기>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에 지원하면서 대부분의 엄마들이 자기는 영알못이고, 영어에서 손 놓은 지 오래라고 이야기한다. 시작하는 첫 책이 그리 길지 않은 챕터북임에도 불구하고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그렇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들 곧잘 읽어나간다. 물론 개개인마다 격차는 있다. 시작부터 모든 문장이 몽땅, 다 이해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시험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내 읽기 실력에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그냥 한 번, 영어로 된 책을 읽어나가는 거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굳이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문맥상 이해하려 노력해보고, 정확히 모르겠더라도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으면 그냥 넘어간다. 그렇게 하루 3-4페이지. 짧은 책이라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루에 이 정도 시간만 꾸준히 투자해도 금방 변화는 찾아온다. 보이지 않았던 문장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고, 해석이 되지 않았던 문장이 해석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어가 생각보다는 그리 두렵고 힘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엄마가 영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엄마표 영어를 하지 않고 더 잘하는 선생님에게 맡겨도 된다. 그것은 개개인의 선택이다. 또 엄마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도 성공적으로 엄마표 영어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분들의 노하우를 따라서 진행해 가도 된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 영어 그림책을 읽고 그 느낌과 감동을 나누고 싶어 엄마표영어를 시작했다. 영어 그림책이 싫었던 아이에게 엄마가 먼저 즐겁게 읽고 그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 말고도 그런 엄마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엄마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영어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높고 힘든 산은 아닐 거라고. 영어책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고.
그리고 함께 하고 싶다. 함께 책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다. 혼자서는 걷지 못했을 길도, 함께라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을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