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育我)였네
이력서에는 적을 수 없는 10년을 살았다. 육아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나의 지난 10년을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이것저것 두드리며 살았지만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는 내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했고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서 돈을 벌 결심을 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테솔 공부를 하고, 아이들 앞에서 솔선수범하고 싶어서 영어 그림책을 읽었다. 그러다 육아에 지쳐 나를 찾고 싶어서 SNS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한 첫 모임이 엄마표 영어하는 엄마들을 위한 영어책 읽기 모임이었다. 결국 또,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나의 시간과 경력을 투자해 육아 중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내 결정이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만큼 후회는 없지만. 때로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내가 희생 중이라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살면서 경력 없이 이어지는 내 시간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지난 10년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도 자라는 시간이었다.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 키우기 수월한 줄 알았는데 시간과 계획에 대한 강박, 완벽주의 같이 내 못난 모습마저 닮아서 트라우마를 종종 건드리곤 했던 첫째. 덕분에 내 안의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귀찮고 힘들어서, 아니 사실은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피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문제들을 꺼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 그냥저냥 살아도 괜찮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더 긴 아이가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문제를 하나하나 마주하고 아이를 위한 해결책을 궁리하다 보니 변한 것이 아이만은 아니었다. 아이가 자라는 그만큼, 나도 자랐다.
반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닮은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둘째는 나를 겸손하게 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었던 나에게, 이 세상에는 yes와 no 두 가지 답안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아이. 육아는 아이가 엄마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아이와 엄마가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작은 아이와의 관계라 할지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육아였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정작 아이는 처음부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었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이만큼 조건 없는 사랑,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내게 무척 생경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육아 중인 줄 알았는데, 나를 키우는 중이었다. 엄마라는 자리에 서지 않았다면 끝내 몰랐을 나의 두려움과 조급함, 부족함. 그것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웠지만, 아이들이 있기에 버텼고, 견디다 보니 자랐다. 엄마로 산 10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나를 공부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