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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류지 Feb 14. 2024

논문 후의 선물

 저번 토요일 아침, 석사 졸업 논문을 제출했다. 제출 버튼을 누르는 즉시 너무나 기뻐서 "야호~!"를 외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제출하는 순간마저도 무척이나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다시 확인할 때마다 수정하거나 추가하고픈 것들이 생겼었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 제출을 해도 되는 걸까. 한번 더 보면 또 고칠 것이 보이지 않을까..' 이런저런 자기 의심이 끝도 없이 들었다. 그래서 그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무언가 무척 서러운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몸은 물론, 마음속 깊은 곳에 엄청난 피곤함이 몰려왔다 허탈했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 1시에 배가 고파진채로 꼬르륵 거리며 집으로 왔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싶어서..  아니 솔직히는 내가 차린 따뜻한 밥상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 늦은 점심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아주 푸짐하고 맛있는 한상이 되었지 뭐람. 냉장고에 있던 양배추, 양파, 당근, 팽이버섯을 팥미소 한 스푼과 함께 몽땅 냄비에 넣고 몽글몽글 끓였다. 이 따뜻한 한 그릇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 힐링시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다음 날인 일요일, 나는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나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그래서 일단, 아침에는 광화문 교보문고로 갔다. 논문을 쓸 당시, 점심을 간단히 먹고 교내 교보문고에서 책을 구경하는 것이 나에게 매일 빠질 수 없는 소소한 행복 충전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날도 서점에서 좋은 글귀를 하나 머릿속에 넣어두고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처음 나의 눈에 들어온 책은 김종원 작가님의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라는 책이었다.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글쓰기를 통해 나의 색을 찾는다는 ,  그리고 괴테의 글쓰기에 대한 조언이 눈에 띄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그리고 글을 잘 쓰고 싶은 요즘의 나에게 무척이나 와닿았다. 사실, 이 날  교보문고에서 맘에 드는 책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무슨 책을 살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해 빈 손으로 서점을 나와야 했다. 학교 교보문고에서 다시 열심히 고민해 보아야겠다.

    무튼, 그렇게 고요하게 오전을 잘 보내고 나는 미식여행을 위해 큔이라는 비건식당에 갔다. 이전에 몇 차례 들러본 곳인데, 이 날은 이곳의 음식뿐만이 아니라 따스운 분위기가 그리워서 오게 되었다. 깊은 발효의 맛이 느껴지는 발표 비건 카레를 한 그릇 뚝딱하고 디저트까지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디저트였는데, 굉장했다. 계피와 팔각향 향이 나는 사과크럼블은 이런 종류의 따뜻한 향신료를 참 좋아하는 나에게 최고였다. 또 생강의 향이 은은히 느껴지는 비건 아이스크림 한 스쿱 위에 얇고 바삭한 초콜릿이 글레이즈 되어있었다. 초콜릿을 조심스레 부셔서 아이스크림이랑 먹으니 환상적이었다.  정-말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배를 기분 좋고 편안하고 든든히 채우고 나와서 서촌 골목 여행을 시작했다. 예쁜 소품이 있는 것 같은 가게 우연히 들어갔는데 진주로 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 진주라서 모양이 불규칙한 것이 참 좋았다. 가격도 괜찮은 듯하여 나에게 주는 선물을 이것으로 하기로 했다. 사장님과 얘기를 아주 잠깐 주고받았는데, 금방 처음으로 오픈하셨다고 했다. 그럼 내가 첫 손님인가..?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그렇게 막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정말 우연히 작은 미술관을 발견했다. '박노수 미술관'이라는 곳으로, 1937년에 지어진, 박노수 화백이 실제로 거주하였던 고풍스러운 가옥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갈까 말까 하는 고민을 잠시도 하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무지 끌렸나 보다. 가옥으로 조심스레 들어가서 나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는 순간 정말이지 잠시 어느 다른, 좋은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 모든 작품, 집 안의 분위기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진 촬영이 불가해서 이곳에 그 모습을 바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차분하고 여유로운 작가의 화풍이 참 좋았다. 많은 색채를 쓰지 않고 여백을 둠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무척이나 편해지게 했다. 가옥 내의 미술작품 관람을 마친 후 뒷마당과 연결된 작은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자그마한 돌계단들을 조심히 올라갔더니.. 우와..! 엄청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서촌의 나지막한 집들, 저 멀리 쭉 뻗은 남산타워, 그날따라 유난히 맑고 예뻤던 하늘까지. 이 모든 것들이 선물이 되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내가 본 서울의 풍경 중에 가장 좋았다.

박노수 미술관의 작은 언덕에서 바라본 서촌

   

 참으로 멋진 하루였다. 고생한 나에게 스스로 선물을 해주는 날. 내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에 가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또 좋은 것들을 보러 다닌 하루. 여러 유혹들을 뿌리치고 논문을 열심히 써서 완성할 수 있었기에 이 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논문 쓰는 것도 참 괜찮은 일인 것 같기도.


    어느 멋진 것에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아서 힘들 수도 있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만 이겨내면 선물 같은 하루가 펼쳐진다. 이것을 한번 경험하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 같다. 그래야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기에. 이제 나는 하나도 허탈하지 않다. 그저 내가 논문을 썼다는 것이 뿌듯하고 대견하다! 그리고 앞으로 학문적으로 더 성장할 내가 기대되며 그 과정에서 노력한 나에게 선물을 주는 시간으로부터 얻을 기쁨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열심히 잘 살아보아야겠다! 나, 고생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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