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이 좋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사와동화 May 06. 2023

사이공에서 앨라배마까지

탕하 라이 / 한림출판사/ 288쪽/ 2013-02-18

탕하 라이 (지은이), 주유진(흩날린) (그림), 김난령 (옮긴이)/ 한림출판사/ 2013-02-18/ 원제 : Inside Out & Back Again (2011년)/ 288쪽/ 2012 뉴베리상 수상작

    

       

열 살 소녀 ‘하’가 1975년 새해 명절 '뗏'에서 다음해 뗏까지 1년을 시로 쓴 일기다. 운문체라 조금더 감정이입이 잘 된다.  "때때로 평화로운 앨라배마보다 전쟁 중인 사이공에 살고 싶을 때가 있다."라는 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줄거리  

 

‘하’는 야무지고 똘똘하며 자부심이 충만한 열 살 소녀다. 아빠는 전쟁 중에 실종이 되었지만, 하는 베트남에서 세 오빠와 엄마와 함께 자기만의 파파야 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복한 소녀였다. 엄마는 하를 지극히 사랑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 가던 1975년, 엄마는 베트남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피난선을 타고 기다리다, 어느 날 구조선이 오고, 괌에 있는 난민촌에 가게 된다. ‘하’의 가족들은 괌에서 카우보이 후견인을 만나 미국 앨라배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베트남 소녀 하는 미국에서 외롭다. ‘싱그러운 여름 향기를 품은 오렌지 빛 파파야’를 좋아하며 ‘녓린’의 소설도 읽을 줄 아는 밝고 똑똑한 아이였지만 영어를 할 수가 없다. 기독교를 믿는 그들과 달리 하는 불교를 믿었고,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면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전후로 황폐해져버린 초라한 곳의 사진을 보여주며 하의 고향이라고 소개를 한다. 

하의 ‘올리브색 피부’와 ‘팬케이크’처럼 납작한 얼굴은 핑크 보이에게 놀림감이 된다. 하는 학교 화장실에서 몰래 점심을 먹으면서 도망가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자존심으로 버틴다.    


다행히 카우보이 후견인과 베트남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워싱턴 아줌마는 베트남 사람인 하와 가족들을 따뜻하게 돌봐준다. 워싱턴 아줌마는 하의 고민을 들어주고 영어를 가르쳐 준다. 오빠 부는 괴롭힘을 당하는 하를 위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나타나 핑크 보이와 아이들이 더 이상 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한다. 하는 친구 팸과 스티븐을 통해 조금씩 힘을 얻는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베트남에 있는 친척들에게 편지를 쓰지만, 아빠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는 답장만 돌아온다. 어느 날 엄마는 일하던 공장에서 아빠가 선물한 자수정 반지를 잃어버리고, 아빠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미국에서 처음 맞는 새해에 하는 아빠가 따뜻한 곳을 찾기를 기도하며 가족 모두의 행복을 바란다.  



하가 쓴 일기


1975년 고양이의 해     


하지만 어젯밤에는 속상했어.


엄마가 그러시지 뭐야.     

올 한 해 재수가 좋으려면

오늘 아침

오빠 중에 한 명이

제일 먼저 일아나야 한다고.    

 

그건 오직 남자 발만

행운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래.    

 

오래 묵은 마음속 응어리가

내 목구명 밖으로 부풀어 올랐어.  

   

그래서 결심했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누구보다 먼저

내 엄지발가락으로

타일 바닥을

톡톡 두드릴 거라고.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   

  

옆에서 주무시는 엄마도

모르시지.       


모두 알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이 배가

마치 개미집이 붕괴되어

미친 듯이 기어오르는 개미들처럼

꾸역꾸역 올라타는

사람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것들.     


하지만

그만 태우라고

할 만큼

매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자신들 바로 앞에서

줄이 끊긴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다들 짐작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


"완벽하게 말하려고 고집하면

영어가 유창해지기 힘들어.

연습이 중요해!

실수를 많이 하면 할수록

실력이 점점 더 쌓이는 거야."     


"애들이 비웃는 걸요."


"부끄러워해야 할 쪽은 그 애들이야!

그럴 땐, 너도 아이들한테

베트남어로 되받아치고

곧바로 비웃어 주렴."


고구마 꼭지를

엄지손톱만큼

잘라 내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손톱 초승달만큼만

잘라 내기로 한다.     

음식을 아끼는

내 알뜰함에

스스로 대견해서

마음이 뿌듯했다.

엄마의

깊은 눈에 맺힌

이슬을 보기 전까지는

     

"에그……, 우리 딸,

반 입 거리도 안 되는

고구마 꼭지

아까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서 자랐어야 하는데……." 


엄마가

카우보이의 친절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시자,

꾸앙 오빠가 한 마디 한다.

그건 미국 정부가 후원자들에게

지급한 돈이라고.     


엄마가

미국 정부의 관대함에

더욱 놀라며 고마워하시자,

꾸앙 오빠가 또 한 마디 한다.

그건 전쟁에서 패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거라고.     


엄마 얼굴이 불붙은 종이처럼

잔뜩 구겨졌다.

엄마가 꾸앙 오빠를 꾸짖는다.

그 입 다물라고.      


"다른 사람의

호의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정치적 의견 따위는 다 배부른 소리야.

이래저래 따질 여유가 없는 거야."     


한 아주머니가 옆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기 머리는 도리도리.     

난 동정받는 게 싫어서

뒤로 물러섰다.


동정받는 사람은 기분 나빠도

동정하는 사람은 기분 좋다고

엄마가 그러셨거든. 


"얘들이 나를 쫓아다니고,

나한테 '부-다, 부-다' 소리 지르고,

팔뚝 털을 잡아당기고,

팬케이크 얼굴이라고 놀리고,

교실에서 나를 툭툭 쳐요.

그래도 제가 참고 기다려야 해요?

저는 그 애들을 때리면 안 돼요?"   

  

"오, 내 딸아,

때때로 싸워야 할 때가 있단다.

하지만 되도록

주먹이 아닌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하렴."  



하의 엄마에게 더 눈길이 갔다.


하의 자부심, 하의 당당함이 마음에 든다. 하는 어리지만 자신의 삶에 있어 꽤 적극적이다. 이런 하라면 어떤 문제든 시간의 차이만 있지 잘 극복해 나갔을 것이다.

나는 하도 좋지만 하의 어머니가 더 많이 생각났다. 어쩜 하의 많은 것들이 어머니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 쓰고 멋만 내고 살았던 엄마가 생활을 책임지며. 베트남 탈출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그럼에도 피난을 갈 때 가장 좋아하는 것 하나를 챙기게 한다든지, 엄마로서 이국 땅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억척스럽게 살지만 지혜롭게 상황을 보게 한다든지,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고 마무리를 짓는 용기까지...엄마로서 훌륭한 점이 너무 많다. 이런 엄마 밑이라면 같은 어려움도 훨씬 극복이 쉽다. 엄마(부모, 돌봐주는 이)의 든든한 울타리만 있다면 아이들은 잘 성장할 것이다. 


이 책은 이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이다. 베트남 여행 때 챙겼다. 베트남의 호텔방에서 읽는 동안, 미케비치 해변(미케비치 바다에는 피난선에서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의 유골들이 엄청 많이 가라앉아 있다)을 지나면서 하의 마음이 처음 읽었을 때보다 크게 다가왔다. 베트남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 동안 우리를 안내한 박 반장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흥링 집은 남베트남에서 상위 일프로에 해당하는 경제적 부를 누렸다. 아버지는 프랑스 고위관료에게 어촌 관련 납품을 하고 고리대금으로 부자가 되었다. 링은 13세까지 곱게 자랐다. 링이 13세였을 때, 아버지가 입대 통보를 받았다. 24개월 의무인데, 1년은 집에서 할 수 있다. 군대에 안 가도 되는 사람으로는 아버지가 참전용사이거나 박사인 경우였고 안 갈 경우 불이익이 많아서 갔다오는 게 나았다.      

미국은 전쟁의 명분을 얻으려고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다. 자진어뢰로 배를 폭파했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아버지는 전사하고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쓰러졌다. 재산 관리도 못하고 남아 있는 재산은 어머니 병간호로 탕진되었다. 

어머니가 죽고난 뒤 링은 거지가 되었다. 베트남은 식당에서 손님이 남긴 음식을 먹을 기회를 준다. 링은 노숙자로 음식을 주워먹고 다녔다. 식당 주인이 링을 가엽게 여겨 쌀국수 가게에서 일하게 했다. 

링은 19세에 사랑에 빠졌다. 한국 파병군인 1세대인 김상규였다.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김상규는 한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라이따이한은 튈 수밖에 없다. 키가 크고 눈매가 다르다. 라이따이한은 머리가 좋다.      

월남전 21년째에 미국은 고엽제를 뿌렸다. 안개비라며 웃통을 벗고 기분 좋게 맞은 군인도 많았다. 다낭박물관, 군사박물관에 가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베트남은 구정 기본 열흘을 뗏 기간으로 모두 쉰다. 전쟁도 암묵적으로 쉬기로 했다. 그런데 이 기간에 북에서 내려와 공격했다. 미국대사관이 폭파되는게 생중계되고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이후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미국은 결국 철수하게 되었다. 호치민은 영웅이다. 베트남의 모든 돈에 호치민 얼굴이 들어 있다.      

남쪽 베트남 사람들은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압제를 피해 도망쳤다. 고무보트에 80명 넘게 탔지만,  그중 10프로 정도가 살아남았다. 수상가옥은 떠돌던 이들의 가옥 형태이다. 링이 탄 배는 11년 동안 떠돌다가 부산으로 떠내려왔고, 1985년 전재용 선장이 96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엘에이로 이주했다. 

베트남은 1989년까지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베트남은 최빈민국이 되었다. 베트남은 미국에게 자유무역권을 달라 바짝 엎드렸다. 1989년부터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김상규 군인은 그때 베트남에 갔으나 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링의 이야기는 지어졌으나 전재용 선장의 이야기는 실화이다.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2004년에 방영되었는데, 그것을 보고 감사의 인사를 하러 엘에이에서 왔고 재회했다고 한다.


손님들에게 더 즐겁게 전달하고 싶어 이야기를 지어서 하는 거라 했다. 링과 하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그 마음이 이뻐서 이 책을 주고 왔다. 아끼는 책이지만 주었다. 그녀는 한국 책이라면서 반가워했다. 그녀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다면 다음 손님들은 베트남 소녀의 마음을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사려 했더니 절판이란다.


베트남 보트피플과 전재용 선장 이야기

_‘난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2016.11호), pp.52-57.에서 퍼옴

jboard (parksimon.com)


1985년 11월 14일 전재용 선장이 이끄는 광명 87호는 1년 동안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 오후 다섯 시쯤 남중국해를 지날 즈음 전 선장은 구조(SOS)를 외치는 조그만 난파선을 발견한다.

그들은 ‘베트남 보트피플’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국제 미아 보트피플을 만난 선장은 ‘관여하지 말라.’는 회사의 지침과 양심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점점 멀어져갔다. 

떠나가는 배를 보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보트피플, 바로 그때 선장은 그들을 구하려고 뱃머리를 돌리게 된다. 파도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작은 보트 안에는 사흘을 굶은 채 엉겨 붙어있었던 96명의 베트남 난민들이 있었다.

선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각오로 96명의 구조 소식을 회사에 알리고, ‘부산항까지 열흘’을 다 같이 버티기로 한다. 선장은 먼저 여성과 아이들에게 선원들의 침실을 내주고, 노인과 환자는 선장실로 데려와 치료하고 보살폈다.

선장은 한국 선원들 25명의 열흘 치 식량과 생수를 96명의 베트남인들과 나누어 먹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선장은 난민들을 안심시켰다. “우리가 잡은 참치가 많으니 안심하세요.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난민 대표였던 피터 누엔이 가족 생각에 슬퍼할 때마다 선장은 극진히 위로했다. 드디어 부산항에 도착한 이들은 난민수용소에서 18개월을 지낸다. 그 뒤 피터 누엔은 전 선장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한 채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 은인인 전 선장을 17년 동안 수소문한 끝에 찾게 된다.

전 선장의 첫 답장을 받고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편지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부산항에 도착한 즉시 전 선장은 회사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으며, 난민 구출 이유로 당국에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가 멍게 양식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편지의 마지막 내용은 더욱 뜻밖이었다. 보트피플을 구조할 때 자신의 앞날과 경력까지 희생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에 적었다. “지금까지 저는 96명의 생명을 살린 저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습니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드디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피터 누엔과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전 선장을 기다렸다 한눈에 선장을 알아보고 뛰어나가는 피터 누엔, 19년 만의 극적인 만남이었다.

피터 누엔은 말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19년 만입니다.” 베트남 난민들이 직접 전 선장을 유엔(UVN)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난센상의 후보로 추천하였지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며 거듭 사양하였다.

사실 그날 베트남 난민들은 25척의 배들로부터 외면당한 뒤 26번 째 광명 87호 전 선장에 의해 구조된 것이다.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생명을 선택한 전재용 선장과 같은 소수의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인 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은 20년간(1955~1975) 지속된 전쟁으로, 당사국인 베트남에서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한다. 해방과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45년 9월에 호찌민이 응우옌 왕조의 황제 바오다이를 폐위시키고 독립을 선언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황제를 다시 내세워 베트남국을 세운다. 결국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과 프랑스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난다. 제네바 국제회의에서 프랑스와 베트남의 무력 충돌의 재발을 막으려 북위 17도 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는 휴전 협정을 맺는다. 이로써 공산주의인 베트남 독립동맹이 장악한 북반부는 북베트남, 비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남반부는 남베트남으로 나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호찌민은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하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 요충지로 삼은 미국은 북베트남 주도로 남·북이 통일되는 것을 막으려 남베트남 정부군을 지원한다. 그러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5년 2월부터는 베트남전쟁에 직접 개입하지만, 1975년 4월 30일에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을 함락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미국은 패전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자랑스러하는 마음이 있다. 미국을 이긴 것이 한몫하는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타 소녀와 좀비 소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