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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사와동화 Sep 06. 2023

기억 안아주기

최연호 | 368쪽 | 글항아리 | 2020년 12월

이 책은 나쁜 기억에 대해 심리학과 뇌과학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의미의 소확행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소확혐이란 말은 어떤가? 소확혐은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이다. 이 소확혐은 과거이지만 종종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몸에 통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소확혐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은, 나쁜 기억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인데 사실상 그 기억의 일부에는 현재의 감정이 끼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확혐이 두려워 다시 경험할 것을 꺼리는 우리는 잠재적인 손실을 상상하는 데 있어서도 현재의 나쁜 감정이 포함된 과거의 나쁜 기억에다 현재의 나쁜 감정이 또 포함된 미래의 나쁜 상상을 하게 되므로 나쁜 감정은 더욱 강화되어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160쪽)


나쁜 기억은 이상하게 잊히지도 않는다.… 나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 곳곳에 알박기를 해놓은 소확혐은 꼬리인 주제에 몸통을 흔들어버린다.… 어찌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꼬리가 잘리기는커녕 머리 행세를 한다. 젊어서 전전두엽을 충분히 이용하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한 치매 환자는 순하고 ‘예쁜 치매’로 가게 되고, 나쁜 기억에만 집착하고 늘 불안해하던 치매 환자는 화를 잘 내는 ‘미운 치매’로 간다. 건망증이 심해지고 경도의 인지 장애를 앓으며 치매가 되더라도 소확혐은 끝끝내 살아남는 것이 확실하다.(260쪽)


어릴 적 버섯처럼 미끌거리는 식감이 별로였던 걸 경험한 아이들은 평생 그 음식을 멀리하며, 학교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가 놀림당한 아이들은 그 상처가 기억에 뿌리를 내려 회사나 공중화장실에서는 큰일을 보지 못한다. 거절을 많이 당한 사람은 특정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려 해도 뇌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고 행동하지 못하게 붙들어둔다. 왕따를 경험한 사람의 뇌와 신체적 고통을 당한 사람의 뇌는 똑같은 부위에서 반응을 일으켰다.


나쁜 기억에 예민한 아이는 자신이 통증을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환경, 시간대 혹은 비슷한 냄새를 접하면 과거의 나쁜 기억이 섬광 기억으로 떠올라, 또다시 이런 통증이 올까봐 불안해하며 미리 겁을 먹는다.


우리 뇌는 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 호기심을 갖고 새로움에 맞서려 하기보다는 물러서려 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나쁜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면서 삶을 피곤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나쁜 기억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고통을 통해 더 성숙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기억이 일상을 해친다면, 망각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가장 훌륭한 방법은 좋은 경험하기와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기다. 소확혐이 자꾸 떠올라도 일단 내버려두자.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친구를 칭찬해보자. 이 모든 좋은 경험은 뇌 영역 곳곳에 기억의 절편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를 나쁜 기억의 망각으로 이끈다. 좋은 기억의 파편들은 나쁜 기억을 합리화할 무기로 쓰인다.


나쁜 기억을 좋은 방향으로 왜곡하는 자기합리화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히는 것이다. 나쁜 기억은 그리 견고하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깰 수 있다. 그러려면 부딪히려는 적극성이 필요하고, 동시에 그걸 덮어쓸 만한 좋은 기억들도 계속 마련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기억을 하나둘 안아주다 보면 우리 뇌는 삶을, 타인을, 자기 자신을 점점 더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확혐을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훈련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승용차 뒷자리에 앉아 늘 멀미를 했던 아이에게는 버스나 기차 의자에 앉혀 창밖이 잘 내다보이는 경험을 하게 해야 한다. 시각과 청각, 평형감각의 일치로 인해 멀미를 하지 않는 좋은 경험을 몇 번 하면 아이는 승용차에서도 멀미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생긴다. 이때 부모는 옆에서 몇 마디 거들기만 하면 된다. “이제 형아가 되었구나. 그래서 창밖도 잘 보고 멀미도 안 하네.” 빨리 자라길 원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커졌다는 기억을 주입하며 멀미라는 소확혐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멀미 방지 패치를 붙이고 위생백을 준비하는 것보다, 아픈 기억에 부딪히게 해서 멀미에서 아예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가 동화를 쓰는 일이 ‘기억 안아주기’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도 어린이들을 아픈 기억에 부딪혀 보게 하고,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바꾸어서 어린이들의 몸과 일상을 회복시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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