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만 원짜리 전자 수첩과 10년 전 위시리스트
어느 날 남편이 퇴근 후, 평소 안 하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식탁에 앉혔다.
"여보, 나 아이패드 하나 사야 할 것 같아."
원무과 행정 직원이 집에서 갑자기 엑셀이라도 돌릴 일이 생겼나 싶어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서정적이었다.
"요즘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의 '힐링'을 좀 해야겠어. 그림 그리려면 역시 화면도 크고 펜슬 반응 속도도 완벽한 '아이패드 프로(Pro)'가 필요해."
사실, 남편은 늘 무언가를 격렬하게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결혼 준비 때부터 그 웅장한 조짐이 보였다. 당시 우린 둘 다 모아둔 돈이 없어서, 친정에서 얻어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기에 결혼식이든 혼수든 뭐든 다 아끼고 쪼개서 준비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 남편은 뜬금없이 '최고급 디지털카메라'를 꼭 사고 싶어 했다.
나는 당장 숟가락 하나도 아쉬운 판에 웬 카메라냐며 사치라고 펄쩍 뛰었지만,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다.
"이거 하나만 딱 사주면, 내 평생 다시는 뭐 사달란 얘기 안 할게!"
당시 그 말이 어찌나 진실하게 들리던지. 또 이제 결혼하면 정말 뼈 빠지게 알뜰하게 살 작정이니, 총각 시절 마지막 소원 수리(?) 차원에서 큰맘 먹고 그 비싼 카메라를 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장엄한 물욕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세상에, 이 남자는 갖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전자기기건, 옷이건, 신발이건, 심지어 온갖 살림살이까지...종류를 가리지 않고 늘 눈독을 들였다.
결혼하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직장 생활을 나보다 훨씬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전 그의 저축액이 내 턱밑에도 못 미치게 초라했던 이유가 바로 저 '넘치는 물욕'도 한몫했을거란것을.
나는 그 단순한 진리를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쨌든 "평생 아무것도 안 사겠다"던 그 맹세는 세월과 함께 증발해 버렸고, 이제는 그림의 '그' 자도 모르던... 아니, 사실 그림은 제법 잘 그리는 남자가 마음의 안정을 핑계로 가장 비싼 최고급 전문가용 패드를 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 100번 양보해서 진짜 그림을 그리며 명작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원래 소질도 좀 있는 사람이니 그래, 예술로 힐링 한 번 제대로 해봐라. 결국 그는 소원대로 제일 비싼 최신형 아이패드 프로와 고가의 애플펜슬까지 풀세트로 결제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최고급 전문가용 패드의 웅장한 쓰임새가 밝혀졌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튜브 먹방을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용도도 아니었다. 150만 원짜리 최고급 캔버스의 정체는... 바로 '초고가 다이어리' 였다.
그는 애플의 최첨단 기술력과 압도적인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그저 오늘의 할 일이나 끄적이고 메모장으로나 쓰는 엄청난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아니, 다이소에서 2,000원이면 살 수 있는 종이 수첩 기능을 굳이 저 엄청난 펜슬의 필압과 화면 주사율로 구현해야 속이 시원했단 말인가? 차라리 그림을 못 그려서 포기한 거면 말이라도 안 한다. 그릴 줄 알면서도 안 그리고 메모장으로만 쓰는 저 당당함이라니!
나는 오늘도 식탁 위에 무심히 덩그러니 놓인 150만 원짜리 전자 수첩을 보며 해탈의 헛웃음을 내쉰다. 그래, 네 마음이 그 비싼 메모장으로 힐링 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다음엔 또 어떤 창의적인 핑계로 위시리스트를 채울지, 내 평생을 바쳐 이 1열 특등석에서 지켜봐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