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힐링' 화백의 최고급 아이패드와 평생의 약속

150만 원짜리 전자 수첩과 10년 전 위시리스트

by 환불포기

​어느 날 남편이 퇴근 후, 평소 안 하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식탁에 앉혔다.
"여보, 나 아이패드 하나 사야 할 것 같아."
​원무과 행정 직원이 집에서 갑자기 엑셀이라도 돌릴 일이 생겼나 싶어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서정적이었다.
"요즘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의 '힐링'을 좀 해야겠어. 그림 그리려면 역시 화면도 크고 펜슬 반응 속도도 완벽한 '아이패드 프로(Pro)'가 필요해."


​사실, 남편은 늘 무언가를 격렬하게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결혼 준비 때부터 그 웅장한 조짐이 보였다. 당시 우린 둘 다 모아둔 돈이 없어서, 친정에서 얻어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기에 결혼식이든 혼수든 뭐든 다 아끼고 쪼개서 준비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 남편은 뜬금없이 '최고급 디지털카메라'를 꼭 사고 싶어 했다.
​나는 당장 숟가락 하나도 아쉬운 판에 웬 카메라냐며 사치라고 펄쩍 뛰었지만,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다.
"이거 하나만 딱 사주면, 내 평생 다시는 뭐 사달란 얘기 안 할게!"
​당시 그 말이 어찌나 진실하게 들리던지. 또 이제 결혼하면 정말 뼈 빠지게 알뜰하게 살 작정이니, 총각 시절 마지막 소원 수리(?) 차원에서 큰맘 먹고 그 비싼 카메라를 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장엄한 물욕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세상에, 이 남자는 갖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전자기기건, 옷이건, 신발이건, 심지어 온갖 살림살이까지...종류를 가리지 않고 늘 눈독을 들였다.
​결혼하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직장 생활을 나보다 훨씬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전 그의 저축액이 내 턱밑에도 못 미치게 초라했던 이유가 바로 저 '넘치는 물욕'도 한몫했을거란것을.

나는 그 단순한 진리를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쨌든 "평생 아무것도 안 사겠다"던 그 맹세는 세월과 함께 증발해 버렸고, 이제는 그림의 '그' 자도 모르던... 아니, 사실 그림은 제법 잘 그리는 남자가 마음의 안정을 핑계로 가장 비싼 최고급 전문가용 패드를 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 100번 양보해서 진짜 그림을 그리며 명작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원래 소질도 좀 있는 사람이니 그래, 예술로 힐링 한 번 제대로 해봐라. 결국 그는 소원대로 제일 비싼 최신형 아이패드 프로와 고가의 애플펜슬까지 풀세트로 결제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최고급 전문가용 패드의 웅장한 쓰임새가 밝혀졌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튜브 먹방을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용도도 아니었다. 150만 원짜리 최고급 캔버스의 정체는... 바로 '초고가 다이어리' 였다.
​그는 애플의 최첨단 기술력과 압도적인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그저 오늘의 할 일이나 끄적이고 메모장으로나 쓰는 엄청난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아니, 다이소에서 2,000원이면 살 수 있는 종이 수첩 기능을 굳이 저 엄청난 펜슬의 필압과 화면 주사율로 구현해야 속이 시원했단 말인가? 차라리 그림을 못 그려서 포기한 거면 말이라도 안 한다. 그릴 줄 알면서도 안 그리고 메모장으로만 쓰는 저 당당함이라니!


​나는 오늘도 식탁 위에 무심히 덩그러니 놓인 150만 원짜리 전자 수첩을 보며 해탈의 헛웃음을 내쉰다. 그래, 네 마음이 그 비싼 메모장으로 힐링 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다음엔 또 어떤 창의적인 핑계로 위시리스트를 채울지, 내 평생을 바쳐 이 1열 특등석에서 지켜봐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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