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아들 A/S 기간은 지났나요?
우리 시어머니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 두 개가 있다. 바로 아들 둘이다. 그리고 우리 집 그 '완벽한 타인'은 그중에서도 둘째, 귀하디귀한 차남이시다.
시댁의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는 절대 깨지지 않는 헌법 제1조 1항이 있다. ‘아들들의 손에는 절대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며느리들은 서서 아들들은 앉아서 혹은 누워서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남편이 계속 누워만 있는 게 민망했는지, 슬그머니 싱크대 쪽으로 다가와 고무장갑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설거지 내가 할게."
그 순간, 옆에 계시던 시어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단숨에 아들을 막아섰다.
"안 돼, 하지 마! 냅둬, 엄마가 할게."
표면적으로는 시어머니가 직접 하시겠다는 자애로운 선언이었지만, 직장 생활 20년 차에 빛나는 눈치 100단인 나는 그 문장 뒤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것은 '내 귀한 아들 손에 물 묻히지 말고, 며느리 네가 와서 하렴'이라는 우아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는 묵묵히 반찬을 통에 옮겨 담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싱크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고무장갑을 꼈다. 그래, 어머님이 하시게 둘 순 없으니 내가 하는 게 맞지.
그런데 내가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트는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어머님이 아들을 향해 애틋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우리 아들, 돈 버느라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좀 쉬어라."
순간 고무장갑을 낀 내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기가 막힌 팩트 하나가 벼락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님, 저기… 제가 어머님 귀한 아들보다 연봉이 훨씬 더 높거든요? 시댁 싱크대 앞에서는 그저 남의 집 귀한 아들 대신 일해야 하는 무급 식기세척기인가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어머님이 오빠 설거지 못 하게 막으실 때, 솔직히 나 좀 섭섭했어."
그러자 완벽한 타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왜 가만있는 우리 엄마를 이상한 사람 취급해?!"
아하, 이것이 말로만 듣던 K-장남/차남들의 역린이구나. 나는 그날 이후로 아주 깔끔하게 입을 닫았다. 굳이 벽에 대고 말을 해서 내 성대와 감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까.
원래 나는 시어머니가 짠하기도 하고, 은근히 정이 가는 분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들을 향한 그 맹목적인 과잉보호와, 그 위에서 아주 호의호식하며 자라난 남편의 만행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이래서 시월드는 다큐멘터리로 보면 비극이구나.
가장 압권은 명절 끝에 날아오는 시어머니의 교육 훈수다.
"애들 어릴 때부터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단디 가르쳐야 한다. 안 그러면 커서 고생해~"
순간,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팩트 폭격을 삼키느라 혼쭐이 났다.
'어머님, 제 아이들을 바르고 온전하게 키워내는 건 제 인생을 건 가장 막중하고 위대한 과업입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지금 아주 치명적인 착각의 늪에 빠져 계십니다.
지금 어머님 등 뒤에서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 숨만 쉬고 있는 저 덩치 큰 생명체가 안 보이시나요? 저게 바로 어머님이 수십 년간 매달리신 '육아 프로젝트'의 처참한 최종 결과물입니다! 가르치셨는데도 결과물이 저 모양 저 꼴이라면 어머님의 프로젝트는 전면적인 대실패작이고, 만약 아예 안 가르치신 거라면 명백한 직무 유기 아닙니까?
도대체 저 완벽한 실패작을 만들어낸 총책임자께서, 무슨 근거로 오은영 박사님 뺨치는 육아계의 무림 고수 행세를 하시는 겁니까! 이미 포장 다 뜯어서 반품도 안 되는 불량품(?)을 넘기셨으면, 조기 교육 타령을 하실 게 아니라 도의적인 차원에서 무상 A/S라도 팍팍 책임져 주셔야죠!'
물론 이 찬란하고 논리적인 사이다 발언은 내 성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식도 언저리에서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대신 나는 '아, 오늘도 시트콤 에피소드 하나 기가 막히게 뽑혔네' 생각하며, 허탈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인이 생산(?)하고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아들을 방바닥에 방치해 두고, 며느리 앞에서는 '육아 일타강사'로 빙의해 교육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설파하는 이 경이로운 내로남불! 본인의 육아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굳게 믿고 계시는 저 해맑은 착각!
그래, 역시 내 인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설프게 분노할 기력조차 싹 빼앗아버리는 이 완벽한 블랙 코미디 덕분에, 나는 오늘도 우리 집 1열 VIP석에서 훌륭한 시트콤 한 편을 직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