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K-시월드의 기적의 논리와 내로남불

어머님, 아들 A/S 기간은 지났나요?

by 환불포기

​우리 시어머니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 두 개가 있다. 바로 아들 둘이다. 그리고 우리 집 그 '완벽한 타인'은 그중에서도 둘째, 귀하디귀한 차남이시다.


​시댁의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는 절대 깨지지 않는 헌법 제1조 1항이 있다. ‘아들들의 손에는 절대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며느리들은 서서 아들들은 앉아서 혹은 누워서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남편이 계속 누워만 있는 게 민망했는지, 슬그머니 싱크대 쪽으로 다가와 고무장갑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설거지 내가 할게."
​그 순간, 옆에 계시던 시어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단숨에 아들을 막아섰다.
"안 돼, 하지 마! 냅둬, 엄마가 할게."
​표면적으로는 시어머니가 직접 하시겠다는 자애로운 선언이었지만, 직장 생활 20년 차에 빛나는 눈치 100단인 나는 그 문장 뒤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것은 '내 귀한 아들 손에 물 묻히지 말고, 며느리 네가 와서 하렴'이라는 우아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는 묵묵히 반찬을 통에 옮겨 담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싱크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고무장갑을 꼈다. 그래, 어머님이 하시게 둘 순 없으니 내가 하는 게 맞지.


​그런데 내가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트는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어머님이 아들을 향해 애틋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우리 아들, 돈 버느라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좀 쉬어라."
​​순간 고무장갑을 낀 내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기가 막힌 팩트 하나가 벼락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님, 저기… 제가 어머님 귀한 아들보다 연봉이 훨씬 더 높거든요? 시댁 싱크대 앞에서는 그저 남의 집 귀한 아들 대신 일해야 하는 무급 식기세척기인가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어머님이 오빠 설거지 못 하게 막으실 때, 솔직히 나 좀 섭섭했어."

그러자 완벽한 타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왜 가만있는 우리 엄마를 이상한 사람 취급해?!"

​아하, 이것이 말로만 듣던 K-장남/차남들의 역린이구나. 나는 그날 이후로 아주 깔끔하게 입을 닫았다. 굳이 벽에 대고 말을 해서 내 성대와 감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까.


​원래 나는 시어머니가 짠하기도 하고, 은근히 정이 가는 분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들을 향한 그 맹목적인 과잉보호와, 그 위에서 아주 호의호식하며 자라난 남편의 만행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이래서 시월드는 다큐멘터리로 보면 비극이구나.


​가장 압권은 명절 끝에 날아오는 시어머니의 교육 훈수다.

​"애들 어릴 때부터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단디 가르쳐야 한다. 안 그러면 커서 고생해~"

​순간,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팩트 폭격을 삼키느라 혼쭐이 났다.

​'어머님, 제 아이들을 바르고 온전하게 키워내는 건 제 인생을 건 가장 막중하고 위대한 과업입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지금 아주 치명적인 착각의 늪에 빠져 계십니다.

​지금 어머님 등 뒤에서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 숨만 쉬고 있는 저 덩치 큰 생명체가 안 보이시나요? 저게 바로 어머님이 수십 년간 매달리신 '육아 프로젝트'의 처참한 최종 결과물입니다! 가르치셨는데도 결과물이 저 모양 저 꼴이라면 어머님의 프로젝트는 전면적인 대실패작이고, 만약 아예 안 가르치신 거라면 명백한 직무 유기 아닙니까?

​도대체 저 완벽한 실패작을 만들어낸 총책임자께서, 무슨 근거로 오은영 박사님 뺨치는 육아계의 무림 고수 행세를 하시는 겁니까! 이미 포장 다 뜯어서 반품도 안 되는 불량품(?)을 넘기셨으면, 조기 교육 타령을 하실 게 아니라 도의적인 차원에서 무상 A/S라도 팍팍 책임져 주셔야죠!'

​물론 이 찬란하고 논리적인 사이다 발언은 내 성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식도 언저리에서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대신 나는 '아, 오늘도 시트콤 에피소드 하나 기가 막히게 뽑혔네' 생각하며, 허탈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인이 생산(?)하고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아들을 방바닥에 방치해 두고, 며느리 앞에서는 '육아 일타강사'로 빙의해 교육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설파하는 이 경이로운 내로남불! 본인의 육아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굳게 믿고 계시는 저 해맑은 착각!


​그래, 역시 내 인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설프게 분노할 기력조차 싹 빼앗아버리는 이 완벽한 블랙 코미디 덕분에, 나는 오늘도 우리 집 1열 VIP석에서 훌륭한 시트콤 한 편을 직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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