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무거운 이야기
나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정말 좋아했다.
20대때 취준하느라 잠깐 쉬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어려서부터 현재까지 빠짐없이 풋살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내가 33세 즈음이었을까.
풋살을 하는 도중에 문득 '내가 살이 좀 쪘나?'라는 생각을 했다.
놀랄 것도 없었다. 오랜 회사생활동안 쌓여온 군살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무거웠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찼다. 무엇보다 불편했던 점은, 발이 빠르지 않았다.
나는 타고나길 발이 빠르게 태어났다. 최고로 빨랐던 것은 아니지만 전교생 400명 중 6,7등 정도는 수성할 정도가 되었으니 신체적 조건이 비교적 좋은 셈이었다.
축구에 있어선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별다른 발재간 없이 그냥 공을 앞으로 툭 치고 제 속도로 뛰기만 해도 친구들이 따라오질 못했다. 타고난 피지컬 덕에 별 노력없이 동네 축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더 이상 빠르지가 않았다.
'살이 점점 찌더니 이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혼자 신기해하며 그 날부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당시 내가 75kg이었는데 4kg만 더 빼면 충분히 돌아오겠다 싶어 식사량을 줄였다.
다행히도 살 빼는 재주는 있었다. 목표치에 금방 도달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살을 뺐는데도, 분명 전보다 몸이 가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난 더 이상 빠르지 않았다.
움직임이 번번히 읽혔고, 슈팅과 드리블은 막혔다.
20대 상대방이 툭 치고 달리면 난 뒷모습을 쫓아가기에 급급했다.
난 더 이상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몸에 기름칠이 덜 된 느낌. 뻣뻣해진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다. 뭐가 문제일까.'
매주 풋살을 할때마다 합리적 원인을 찾기 바빴고 그렇게 도출한 솔루션은 그 다음주 실험하기를 반복했다.
한달, 두달, 세달, 1년이 지났다.
우울했다. 살을 더 빼야 하는것일까? 60kg대로 내려가는 것은 솔직히 자신이 없는데...(뼈만 남는다 뼈만...)
그러다 어느날 문득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청천벽력.
아, 그렇구나. 난 이미 전성기가 끝난 것이구나...
신체적 전성기가 지난지 오래라는 것을 깨닫는데 무려 1년이 필요했다.
정말 몰랐다. 살면서 단 한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단계였기 때문이다.
매주 노력하는 만큼, 실력도 정비례하는 것이 세상 이치라 하기에, 단순히 그것만을 진리처럼 믿었다.
오랜시간 꾸준히 뛰어왔기에, 또 그만큼 성장해 왔음을 알기에 이 낯선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비로소 1년이 지난 후에야 인정하기 시작한 바보가 여기 있었다.
뼈를 깎는 다이어트도 해보았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식단도 챙겨보았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이런 것들로 세월을 거스를 순 없었다.
신체적 능력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정점을 찍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리막을 걷고 있던 것이었겠지.
나의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아마 28세에서 31세 사이였던 것 같다.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고 몸이 깃털같다고 느꼈으며 순간 판단력 또한 가장 빠르던 시절이었다.
찬란했던 과거가 있던 것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축구가 좋고 여전히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데,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방정식을 대입할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기대수명은 9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데 내 남은 60년이 계속 느려지고 둔해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글펐다.
이것만큼은 정말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진했다.
붙잡던 미련들을 점점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고 그간 운동장에서 추구했던 욕심들과도 점점 이별하게 되었다.
지금 내 나이 35살, 프로선수들로 치자면 변방리그로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나이다.
이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별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즐기고 있다. 행여 20대 팀과 경기하는 날에는 승부욕이고 뭐고 혹시나 내 몸 다치지 않을까 사려가며 뛴다.
20대 영건들이 주름잡는 축구판에서 2군으로 밀려나버린 내 모습을 마주한다.
조금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에게도 그들처럼 빛나던 순간이 있었으니까.
동시에 나는 직장생활에 있어,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조금은 달라졌다.
과거보다 조금 더 관대해졌다.
타인을 바라보는 기대치가 많이 낮아졌다.
'그래 조금 못해도 괜찮아. 당신도 열심히 했겠지. 진심을 담았으면 그걸로 된거야.'
사실 대리때만 하더라도 낮은 퍼포먼스를 보이는 선배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날이 서있었다.
선배라면 최소 이 정도는 해야되는거라고 판단했고, 지금 미흡해 보이는 것은 과거 노력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비판받을 선배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들에게도 분명 전성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다만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것 뿐이라고,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그들과 비슷해질 것이라고.
전성기가 지난다는 것은 신체 변화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힘과 처리속도 또한 변화를 겪는다.
나 역시 그렇다. 풋살을 할때, 게임을 할때에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과거만큼 빠른 판단력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PC 축구게임에도 사족을 못쓰는지라, 20대 때는 교내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하고 전국 랭커에 가까워진 적도 있다.
허나 지금은? 평균보다 조금 위에서 논다. 중학생 상대로 한판 이기면 '좋아, 나 아직 안죽었어!' 그저 기분이 좋다.
별 수 있으랴. 인간이란 본디 그런 것일텐데.
타인의 뜻하지 않은 실수와 헛발질에 눈 감아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지향하게 되니 나 역시 조금은 완벽주의에서 해방되고 여유를 찾는 것 같다.
이제 나에게 세월이 흐르는 것은 늙어간다는 의미로서 먼저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서글프기도 하지만, 앞서 걸어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을 보며 가끔은 내 모습을 투영해 본다.
인간의 젊음은 참 짧은 반면, 너무 오랜 시간 늙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부자도 거지도, 잘생긴 남자도 예쁜 여자도 모두 예외일 수 없다.
과거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자연의 섭리 앞에 겸허와 겸손을 배워가는 시간.
그러니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전성기가 지나간 후 이런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