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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야기

13. 아버지의 할아버지

by 큰나무

아버지는 밤이면 화장실을 자주 찾으신다. 요즘은 겨우 몸을 일으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지팡이 짚고 걸어가신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느 날 밤, 시계가 자정을 가리킬 무렵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조용히 옛이야기를 꺼내셨다. 국민학교 시절, 장날이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시장으로 달려가곤 하셨단다. 우시장 한복판, 높은 단상 위에서 우리 소들이 거래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발밑으로 다가가면 할아버지는 엿도 사주시고, 고기국밥도 사주시며, 허리춤에서 용돈도 꺼내어 쥐어주셨다고 하신다. 그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듬뿍 사랑을 받았던 유년 시절. 그러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아버지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느라 여유가 없으셨던지, 아니면 집안 형편이 기운 탓인지, 인색해지셨다고 했다. 학교 갈 차비며 용돈도 절반만 주시고, 늘 등을 돌리셨던 기억이 아버지 마음 한편에 서운함으로 남아 있으신 모양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아버지는 조심스레, 그러나 씁쓸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셨다.


당신의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 컸는지 지금도 아버지는 장손도 아니면서 그 할아버지의 제사를 홀로 모시고 계신다.


사랑과 관심은 때때로 지나치면 독이 되기도 하지만, 따뜻한 애정과 온전한 관심을 받고 자란 사람은 자연스레 바른 인성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요즘은 자식을 한둘밖에 두지 않다 보니, 그 사랑이 지나쳐 아이가 엉뚱한 방향으로 크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래서일까, 적당한 거리 두기와 절제된 관심, 그리고 묵묵히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태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잠드신 아버지를 바라본다. 어젯밤, 내가 안방에서 늦게까지 있다가 작은방에서 잠든 걸 새벽에 화장실 다녀오시며 눈치채셨는지 오늘은 어디서 잘 거냐고 물으신다. 웃으며 "안방에서 잘 거예요"라고 답하니, 아버지도 빙긋 웃으신다.


그 미소가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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