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한여름이다.
한여름이다.
옥수숫대는 어느새 내 키보다 훌쩍 자라 있었고, 옥수수 끝에 달린 하얀 수염은 짙은 갈색으로 바뀌어 간다. 매미는 키 큰 은행나무 꼭대기에서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밤이면 마실길 옆 풀숲에서는 풀벌레들이 관현악단처럼 일제히 연주를 시작한다. 그 모든 풍경이 "지금은 한여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레길을 걷다가 미루나무 몇 그루를 만날 수 있다. 요즘 보기 드문 나무다.
미루나무 잎들이 바람결에 서로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그 소리에 발걸음이 절로 멈춰진다.
이 바람소리는 소나무숲 바람소리와 다르고 대나무숲 바람소리와도 다르고 아마도 자작나무 숲 바람소리와 비슷할 것 같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신작로 갓길에 늘어선 키 큰 미루나무들. 나는 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따라 학교에 가며 이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
솔바람이 불어와서 살짝 던져 놓고 갔지요.”
그 노래처럼 미루나무 위에 떠 있는 조각구름이, 어린 날의 마음에 걸려 있던 시 한 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미루나무를 좀처럼 볼 수 없다.
지금의 여름은 너무나도 더워졌다.
에어컨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더위 속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정신이 아득하다. 24시간 내내 전기를 틀어둘 수는 없어, 마음먹고 에어컨을 끄고 지낸 지도 벌써 2주가 넘었다.
오전엔 그럭저럭 참을 만하지만, 늦은 오후가 되면 견디기 어려워진다. 그럴 땐 밖으로 나가 둘레길을 걷는다. 나무 그늘 밑을 맨발로 조심스레 걸으며 땀을 식힌다.
바람이 불어오면 잠시나마 시원해지고,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서는 발을 담그기도 한다. 물살이 발가락을 휘돌며 식혀줄 때,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름은 이겨내는 계절이 아니라, 그저 조용히 넘어가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그렇게 하루해가 넘어간다. 들끓는 열기 속에서도, 바람 한 줄기와 나뭇잎 소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기대어 나는 여름을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