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자 펼쳐지는 광경으로부터
읽다 보면 힘을 빌려 쓰고 싶어지고, 쓰다 보면 또 쓰레기 같은 글을 썼구나 하고 읽고 싶어진다.
과잉된 작가적 자의식이 한심한 글 밖에는 낳지 않는 요즈음, 개인적인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처음에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왜일까? 누군가의 문장에 구원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카프카가 아닐까. 카프카는 여러 각도에서 읽히지만 처음에야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였다. 체호프의 희극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카프카를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어쨌든 비애와 냉소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의 삶의 궤적을 더듬곤 저 밑에 있는 것이 울분이나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곤 이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유에 관한 단편, 원숭이와 의사, 그리고 아들의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고원에 적어왔다. 뾰족한 절정과 달리 이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풍경을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하여 소유하고 싶었다. 소유하기 위해 적었던 시절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 글에선 언제나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꾀하는 글은 실패한다. 푸른 유리를 듣고 생각했다. 고원에 힘입어 표현해야 했던 것은 고원 그 자체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언덕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