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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틀 Dec 06. 2024

5장 엄마가 작가가 될 거라는 걸 믿어!

천직에 몸을 맡기려는 사람도 물론 스스로 결단해 그 일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결단할 때는 기대 외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지 말고 계산도 하지 말아야 한다.  -기시미 이치로


 부끄럽지만 얼마 전 두 아들을 혼내던 중 눈물을 왈칵 쏟은 적이 있다. 객관적으론 나쁘지 않은 상황인데도 매우 불행한 일인 양 확대하는 못된 습관이 발동한 것이다. 스스로 불행 속에 가두는 짓은 이제 그만하자고 다짐해 놓고 또 그런 일을 해버렸다. 아이들의 잘못과는 무관한, 엄마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던 속내를 감추려니 이야기는 중언부언,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엄마는 암 환자인데도 하기 싫은 것, 힘든 거도 참으면서 하잖아. 사실 엄마 너무 힘들단 말이야”


 사춘기에 들어선 첫애를 기어이 울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마음 약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4학년이 된 둘째는 이미 시작부터 울고 있었음은 안 봐도 뻔한 장면일 테고.


 아이들을 앉혀놓고 전했던 내용을 대략 추려보면 이러하다.


엄마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적용해서 몇 년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가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도 받게 되면서 학생들이 줄기 시작했다. 그러다 암 진단까지 받아 수술받느라 공부방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다시 공부방을 열기는 했으나 학생 수는 전성기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이다. 게다가 올해는 고 3이 많아 수능이 끝나면 남는 학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엄마는 사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래가 불안하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계속 지내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엄마는 요즘 마라톤에 처음 도전하고 책도 읽기 시작했고, 어릴 때부터 원했던 책 쓰기도 도전 중이다. 물론 지금 하는 공부방 운영도 인원과 관계없이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엄마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대폭 줄었다는 말에 두 아이가 불안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우리는 부자야.”라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저 처음엔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고 불만투성이인 걸 고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앞에 놓고 훈계할수록 감사를 잊고 불만만 키웠던 나에게로 비난의 활촉이 향했다.

 처음엔 아이들에게 엄마가 어떻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극복하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 한 문장이라도 좋으니 매일 써보자고 다짐했다. 주제는 아무려나 좋았다. 소설의 도입부도 써보았고 책을 읽다가 꽂혀버린 ‘단어’를 시작으로 짧은 에세이도 써봤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글을 읽어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시작한 글이 지금의 것이다. 글을 시작할 즈음 다시 ‘끌어당김의 법칙’ 분야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니 새록새록 내가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걸 있는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일요일 밤, 약 다섯 장 분량의 글을 들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자기 전에 읽어줄 책으로 엄마 글을 가져왔는데 읽어줘도 될까?”

 첫애와 둘째 모두 처음엔 시큰둥했다. 그러나 엄마, 아빠의 신혼 생활 이야기와 실직, 유산 등등의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자 안 듣는 줄 알았던 두 녀석의 입에서 동시에 “엄마 이거 실제 이야기야?” 가 튀어나왔다. 둘째가 A4용지를 들고 있는 내 곁에 바짝 붙어서 “엄마 어디까지 읽었어? 어디야 지금?” 하며 문단을 손가락으로 짚어댔다.

 나의 첫 낭독회는 꽤 성공적이었다. 이십여 분의 시간이 어찌 지나갔나 싶었고 둘째는 왜 이렇게 글이 짧냐고 아쉬워했다. 글 초반이라 형은 등장하는데 아직 본인은 태어나기도 전이라며 본인은 언제쯤 등장하는지도 물었다. 그러곤 다음 주 일요일엔 두 배 분량으로 열심히 써오라고 반협박을 해왔다. 학교에 갈 땐 엄마의 글을 가져가서 독서 시간에 읽고 싶다는 걸 간신히 뜯어말렸을 정도다.


 그렇게 두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다는 열망이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세 번째 낭독회가 열린 밤이었다.

 “엄마, 나 다음 주에는 엄마 책으로 독서록 써도 돼?”

 학교에서 매주 한 번씩 독서록 숙제가 있는데 일요일이면 집 앞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은 후 독서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남편이 끼어들었다.

 “그건 좀 그럴 거 같은데? 가족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다 보니 좀 그렇지 않을까?”

 나 역시 내 글을 읽고 독서록을 작성한다는 게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엄마도 아빠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려던 순간, “왜? 우리 엄마는 작가가 꿈이라서 지금 작품을 쓰는 거잖아. 이거 책으로 내면 사람들이 다 읽는 건데 엄마 것으로 독서록 하는 게 어때서? 아빠는 엄마가 책 낼 거라는 걸 안 믿어?”

 순간 나조차 책을 낼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너무 고마워, 아들. 엄마를 지금부터 작가라고 생각해 줘서. 대신 너무 자세한 줄거리까진 쓰지 말자. 엄마 작품이 좋아서 누가 표절할 수도 있잖아?”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럼 엄마의 책 내용은 비밀이라고, 말해줄 수 없으니 나중에 꼭 사서 보라고 해야겠다.”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기록하라는 조언이 담긴 책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바라는 것이 현실이 될 거라고 진짜 믿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둘째가 독서록으로 내 글을 선택했을 때, 속으로 ‘푸핫, 무슨 엄마 글로 독서록 할 생각을 하지? 엉뚱하고 귀여워.’ 했던 것처럼 내가 꿈꾸는 미래가 그저 실소의 대상이 되는 길을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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