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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2. 2023

지적허영심

- 독서편 

          나는 도대체 왜 잘하는 게 하나도 없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감 결여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발표를 잘하는 아이. 말을 잘하는 아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157cm의 키를 자랑하던 나는 달리기 마저도 늘 꼴등을 하여 가을운동회를 그토록 싫어하던 아이였다. 미모도 공부도 실력도 모든 면에서 우등이었던 S양의 친구가 인생 로망이었던 나는 수줍게 일기장에 그런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고백하였고, 담임선생님께서는 네가 먼저 다 가보라는 피드백을 남겨 주셨지만 천성이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끝내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는 담임선생님은 S에게 나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S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요즘 말로 인싸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담임선생님의 계획하에 단체로 구청에서 시행하는 자연보호 글짓기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무려 장려상을 탔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처음으로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처음으로 S보다 잘하는 게 생긴 것이다. 


        이내 글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를 표방하며, 순진하게도 모든 고전을 읽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도스트에프스키에 죄와 벌을 읽었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 모파상 단편집.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스탕달의 적과 흑. 내 지적 허영심의 시작이었다. 


         6학년이 되어 방가 후 글짓기 반 학생들 모집을 했다. 글 잘 쓰는 친구를 추천해 달라고 하셨다. 아무도 나를 추천하지 않자, 나 스스로 손을 들고 방가 후 글짓기 반에 들어갔다. 글짓기 대회 출품만을 위해 선발된 이 그룹의 학생들은 매일 같이 남아 선생님이 주는 주제에 따라 원고지 10장 내외를 써야 집에 보내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교무실로 나를 불러 세워 나의 표현력이 어린아이 같지 않다고 심하게 꾸짖기 시작했다. 이유는 내가 "짜증이 났다" 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짜증이 난 걸 짜증이 난다 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란 말이야 라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친히 다른 친구가 쓴 글을 보여주셨다. 정답은 "심술이 낫다." 아차 싶었다…. 얼마나 고귀한 표현인가….  반년 넘게 원고지 10장 쓰는 연습과 대회의 특성에 맞는 글을 써 내려가는 훈련을 받은 나는 그 뒤로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학교 대표 글짓기 대회에 상 받는 용도로 내 쓰임을 다한 나는 중학생 이후로 일기쓰기외에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글쓰기 재능 발견은 영국에서 일어났다. 무식하게 시작한 영국 대학생활의 내 최대의 고민은 학비이고 돈이었는데 국제학생 대상으로 글짓기 대회가 열린 것이다. 상금은 무려 100파운드. 

돈에 눈이 멀어 초등학교 6학년 글짓기 선생님한테 배운 주특기로 무려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승전결이 있어야 했다. 대상은 국제학생들. 그럼 학교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뻔했다. 


         잘 나가던 일본 무역회사에 다니던 27살 한국인이 꿈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환상을 품고 온 영국은 왠 걸... 우중충한 날씨에 영국식 발음은 당최 알아들을 수 가없고, 나는 추워 죽을 거 같은데 다 벗고 다니는 영국 여자들이 진짜 안 추운 건지 섹시하게 보이길 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위트 있게 담아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학부의 여러 도움과 액티비티를 통해 건강한 유학생활의 시작을 하게 됐다는 결말. 그리고 나는 1등, 상금 100파운드를 받게 되었다. 


       나를 비웃던 스페인 친구들은 한날 밤 잡지에 실린 내 사진을 보고 이게 네가 맞냐고 달려왔으며 나는 쉐필드 지역신문에 무려 대문짝만 하게 기사도 실렸다.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또다시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 학기에 이러 지역이 아닌 전국대회에 도전하게 되었다. 


       상금은 무료 5천 파운드…. 마지막 학비가 너무나 절실했던 나는 글을 쓰고 다듬고 또 다듬었다. 주최 측이 좋아할 만한 글을 또다시 기승전결에 맞게 아주 잘 써 내려갔다. 


       어떻게 됐냐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는 아주 잘 쓴 글이라 생각되는 이 글은 Highly Commended를 받았다. 3등쯤이라고 해야 되나? 상금은 없고 명예만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학비는 겁도 없이 신용카드로 긁어버렸다는 서글픈 전설… 


        내가 그때 크게 배운 한 가지는 좋은 글은 가장 솔직하고 가장 진솔한 이야기에서 비롯된다는 걸 10년이 훌쩍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그 시절 글쓰기 대회에서 상 받을 요량으로만 글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잠시 원망스러웠다. 내 지적 허영심의 말로. 


        책을 다시 읽게 시작된 것은 의아하게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기 힘들 때 누군가 독서가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앉아서 책을 읽기가 쉽지 않기에. 


        그런데 거짓말 같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일요일 늦은 밤 책을 읽는 것이 작금의 고민과 업무의 고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월요병 따위는 사라졌다. 그 뒤로 나는 줄곧 책을 읽기 시작했고, 천천히 글을 끄적거려보기도 한다. 


나는 나름 지적 허영심 가득한 문학소녀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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