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추억 또는 기억으로 제목을 붙였다.
지나간 일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기억이 되기도 한다.
두 가지가 글에 어떤 다름이 있나 생각해 보면 추억은 달콤하고 촉촉한데 기억은 무미건조했다.
공항
그리운 사람이 떠나고,
때론 내가 떠나고,
그리운 사람이 남겨지고,
때론 내가 남겨지고..
만남의 순간이 반갑지만
결국엔 헤어짐의 무게가 더 컸고,
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없는 이별이 있던
공항은 항상 슬펐다.
김포국제공항만 있던 시절에 늘 슬픈 이별을 했다.
남이 떠났고, 내가 떠났다.
나는 비행기에서 눈물이 났고, 배웅하고 돌아섰을 가족들은 돌아가는 차편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신파스럽지만 환경이 그랬다.
서로의 소식을 전하기에 국제전화 비용은 꽤 비쌌고, 편지는 아무리 빨라도 2주가 걸렸었다.
시간의 차이를 맞추기도 어려웠고, 마음의 시차를 맞추기는 더 어려웠다.
칠순의 엄마는 동사무소 취미반 강습에서 이메일 쓰는 법을 배우고, 단지 메일 보내기를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사셨다.
요즘도 간혹 드라마에 공항의 슬픈 이별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좀 우스꽝스럽다.
비행기 착륙과 동시에 띵띵 띠딩 띵!
핸드폰을 켜면 잠시의 비행시간을 참을 수 없었다는 듯 사방에서 카톡카톡카톡카톡!
사람들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화상통화를 켠다.
물리적인 느낌이 아쉬울지언정 때론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갈망이 생길 정도다. 만일 떠날 때 울고불고했다면 무안할 지경이다.
내 기억 속의 공항은 헤어짐, 슬픔, 쓸쓸함, 단절이었다.
김포공항이 그랬고, 아름다운 바람의 도시인 시카고 오헤어공항도 그랬다.
큰돈이 드는 한국 방문은 딱 두 번이 있었다. 애들은 떼어놓을 수 없었고, 남편의 비행기 삯은 없어서 한 번도 한국에 오지 못했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미국 내에선 무작위로 승객의 몸수색을 했었다.
그 이듬해 일이 있어 혼자 애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가 2주 만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작은 동양 여자와 네 살, 여섯 살의 어린아이로 구성된 가족승객인 위험의 가능성이 낮은 우리가 굳이 왜 선택됐을까?
많은 사람이 대기하는 게이트 앞에서 신발까지 다 벗고 서서 무섭게 덩치가 큰 경찰들이 아이들의 맨살 등뒤로 손을 집어넣어 뒤지는 아주 수치스럽고 기분 나쁜 경험이 있었다. ‘과연 무작위는 맞았을까? 인종차별이 아니었을까?’
여권파워 1위인 우리나라가 된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 여러 번의 공항이별의 세월을 끝내고 돌아올 땐 처음으로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왔다.
늘 번화한 도시의 건물이나 화려한 불빛을 보며 김포공항으로 착륙할 땐 뭔가 안도감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타지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던 마지막 비행의 착륙지는 인천국제공항이었다.
사실 육지로의 착륙보다 바다로의 착륙이 비상낙하를 한다면 위험성이 감소된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적인 많은 불안감을 내재하고 있어서였을까?
반짝이는 육지가 보이며 안심이 되는 순간 비행기는 다시 바다로 나가더니 깜깜한 바다 위 하늘에서 활주로의 가이드라인만 보며 하강을 하는 비행착륙은 무척이나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깊고 검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 대체 왜 섬에다가 공항을 만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을 꼭 끌어안았었다.
공항은 내 기억엔 아주 별로다.
‘공항을 다신 가고 싶지 않다...’
귀국 후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공항을 가지 않았다.
어른이 된 아이들이 멀리 여행을 간다고 해서 데려다주었지만 섭섭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무사히 돌아오면 언제나 안심이 되었다.
여행으로 제주를 가기 위해 단절의 장소였던 김포공항을 갔다.
슬픔의 장소였던 공항에 새벽시간인데도 정말 많은 즐거운 사람들이 있음에 놀랐다.
좋은 사람들과의 여행이어서 그랬는지 설레고 들뜸이란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요즘은 여행 가는 기분을 느끼려고 국제 허브가 된 멋진 인천 국제공항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신기한 현상이지만 내 기억 속의 공항이 남아있어 아직도 그러고 싶은 생각까지는 안 든다.
앞으로의 나의 공항은 추억이 될까? 기억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