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사랑
2부. 도시락 사랑
나의 해외생활의 걱정 중 1/3쯤은 도시락 고민이었다.
남편의 도시락 두 개, 아이들의 간식과 점심 도시락 두 개를 매일 만들어야 했다.
요리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이 시기에 요리솜씨가 일취월장했으며 나의 특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돈을 대 줄 테니 공부를 마치면 돌아오라던 회사의 권유를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때려치웠다.
삼십 중반의 늦깎이 학생이었던 남편은 돌봐야 할 영어도 한국말도 잘 못하는 마누라와 토끼 같은 아이가 둘이 있어 아주 바빴다.
젊고, 활기찬 이십 대 미혼의 학생들과 겨루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새벽 6시에 학교 연구실로 나가면 날을 넘겨 1시나 2시가 되어야 돌아왔다. 일요일도 예외는 없었다.
햄버거를 먹거나 두 가지의 음식을 고르면 날아가는 쌀밥 위에 올려주는 중국식 익스프레스를 먹어도 하루 두끼에 30달러가 들었다.
당시 환율이 달러당 1200원에서 1300원을 오르내렸으니 무시무시했다.
마땅찮은 음식에 쓰는 돈도 아까웠고,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더 오래 나가있는 남편이 그런 밥을 먹는 게 마음이 안 좋았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는 그릇에 밥, 국과 머핀틀로 칸을 나누어 반찬을 담았다.
계란말이와 한국에서 온 도시락 조미김, 멸치 고추장볶음, 감자조림, 두부조림, 콩자반, 김치볶음, 고추장볶음, 소불고기, 고추장 불고기 등등
점심과 저녁의 다른 내용의 도시락 두 세트를 만들어 보내려니 도시락에 넣을 만한 반찬을 마련하는 것은 꽤나 고민되고 바쁜 일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메인 홀에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공짜로 맘껏 먹으라고 늘 제공되었다고 한다.
과일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사과는 매일의 작은 행운과 같았다.
가끔 그 행운의 사과를 먹지 않고, 예쁜 사과 한 알을 가져와 먹어보라며 내게 주면 그 마음에 설레었었다.
백설공주가 먹었을 것 같이 빨갛고 반짝이며 약간 길쭉하게 생긴 사과인데 껍질째 와삭 깨물면 참 맛도 좋았다.
학교 다닐 때 매점에서 사 먹던 작은 사과만큼 맛있었다.
이후 마트에서 그 사과와 같은 넘버가 붙어있는 사과를 사서 그냥 먹기도 하고, 시나몬 향 가득한 사과파이를 만들기도 했다.
결혼 후 도시락 반찬을 고민하며 살게 될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도시락 반찬고민의 문제는 애교스러웠다.
미국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측불허였고, 실패란 우리의 상상 속 미래에 없었다.
원하는 일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계획은 없었으니 목적했던 바를 이루려 우리 둘은 모두 열심히 노력했다.
산다는 게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진즉 알았지만 그래도 겪을 때마다 상처는 생겼고,
상처는 아직도 통증으로 느껴진다. 아픔은 생각할 때마다 더욱 선명해졌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란 말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과의 번호가 4016이었던가?
우리는 행운이라 여겼던 빨간 사과에 유혹되어 그 파장이 얼마나 큰 것일지는 모른 채 달려가던 시간이었다.
남편은 가진 것이 없어도 늘 유쾌했고, 정의롭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점점 그림자처럼 사는 나의 일이 힘들었고, 공부는 그가 알아서 할 일이라 생각했었다.
우린 서로를 보지 못했다.
목표를 목전에 두었던 시점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압박은 오랜 시간의 노력을 포기란 것으로 스스로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짐을 정리하던 날에 고군분투하여 얻었을 남편의 all A의 성적표를 처음 보게 되었다.
혼자 차에 앉아 참 많이 울었다.
그의 노력과 애씀이 물거품이 되는 시간이었다. 나의 도시락도...
두 개를 챙겨야 했지만 전날 만들었던 반찬에 새로 한 밥과 한두 가지만 새로 만들어 싸주면 되는 어른의 도시락은 그래도 편했다.
문제는 아이들의 도시락이었다.
아이들의 학교에선 점심시간이 되기 전 중간쯤에 있는 간식 시간에 견과류나 단맛이 강하지 않은 건강한 간식을 보내라고 했다.
애들이 견과류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 짜 먹는 요거트나 스트링 치즈, 애플소스, 오렌지를 번갈아 넣어주면 되니 어렵지 않았다.
애플소스란 마치 어렸을 적에 엄마가 사과를 반 가르고 수저로 박박 긁어서 입에 넣어줬던 달콤한 사과의 과육 같았다.
밀봉된 작은 컵에 담겨 있는 것을 마트에서 파는데 그곳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주로 챙겨 먹이는 간식이었다.
아이들은 급식을 먹을 수 있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선 따로 영어교육도 무료로 해주었으니 급식은 유일하게 돈이 드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예정된 급식표에 특별한 메뉴가 있는 날만 사 먹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맛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 애들이 외국인이어서가 아니고, 맛과 가성비가 별로여서 그곳 아이들도 도시락을 많이 가져왔다.
아는 한국사람들은 애들을 사립학교에 보냈었는데 어쩌면 애들의 학교가 무료로 다니는 공립학교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온 천지가 카펫인 바닥 생활로 인해 큰애는 아토피가 생겼고, 몸이 거부한 것인지 아이는 피자, 핫도그, 햄버거 같은 음식을 싫어했다.
큰애는 배짱 좋게 “뭐 어때?”
누가 뭐라 해도 신경 쓰지 않고, 볶음밥이나 좋아하는 반찬을 담아 한국식 밥을 싸가지고 다니며 꿋꿋이 먹었다.
운 좋게도 일본인 친구 스즈키가 있었고, 그 아이도 비슷한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귀국 후 큰애는 종일 앉아있는 한국의 학교생활이 허리가 아파서 싫지만 밥을 주는 학교급식이 감동이라고 했다.
작은애의 친구들은 낯선 음식에 대해 과격하고 짓궂은 남자아이들식의 표현을 했으니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싸주거나 파스타 같은 불편하지 않은 음식을 보온통에 넣어주었고, 원만한 교우관계와 점심시간이 될 수 있었다.
도시락 싸주는 일이 힘들다고 가만히 숨만 쉬어도 생김새에서 구별이 되는 어린아이에게 굳이 악조건에서 억지로 버티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돌아온 내 나라에선 내가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무엇도 다름이 없는 곳에서 남의 나라에서 보다 더한 극악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렵고 무서웠던 그 마음은 아직도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도시락 얘기를 하기로 했으니 그 얘긴 언젠가 할 수 있을 때 하기로..)
차라리 내가 힘들게 도시락을 만들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살던 동네에 한국식품을 구할 곳은 어릴 적 구멍가게 같은 한인마트 두 개뿐이었다. 두 개지만 같은 물건을 팔았다.
문을 열면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들을 수 있는 그저 내 나라의 향수를 느끼러 갈 뿐이었다.
많은 필요한 식재료를 중국마트나 일본마트에서 사거나 큰맘 먹고 당일치기 열두 시간 왕복으로 큰 도시의 한인마켓을 가야 했다.
한식당이 없을 만큼 동양인, 그중 한국인이 드물었던 곳이어서 학교 안의 고정적인 한국인은 우리 애들 둘과 한국계 미국인 두 명뿐이었다.
학교의 스페셜한 축제날에 나눠 먹게 할 생각으로 김밥을 많이 만들어서 학교로 갔다.
그곳의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고, 검은 종이로 쌓인듯한 한국 김밥을 무서워했다.
큰 아이는 자기 반 아이들 모두에게 먹어보길 권했다. 입을 막고 절대 안 먹는 아이도 있었고, 여러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선생님들.. 어떤 것이든 두려움은 어른들이 더 심하다.
나와 아이가 보는 면전에서 거절을 하지 못했다.
입에 넣고 꿀떡 삼키는 분도 있었고, 한입에 먹어야 하는 김밥을 베어 물어서 와르르 쏟아지기도 했다.
민망함에 다시는 김밥을 보내지 않았다.
일본인 친구 스즈키와 가족들은 김을 무척 좋아하고, 김치를 좋아했다.
그 애의 엄마는 순두부찌개 끓이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기도 했다.
말주변 없는 나는 남편에게 검사를 받은 순두부찌개의 영어 레시피를 종이에 예쁘게 적어서 주었다.
스즈키네가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 김을 선물했었다. 나고야 어디쯤에 산다고 했는데..
최근에 두부와 가성비 좋은 포도주를 사러 종종 다니던 상점인 Trader Joe's에서 파는 한국 냉동김밥의 품절 사태를 보았다.
그 당시에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검은색 음식과 떡이었다. 낯선 쫄깃한 식감과 들러붙는 느낌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떡볶이를 먹겠다고 외국인들이 줄 서는 것이 참 신기하다.
정말 세상은 요지경일세..
세 가지의 다른 도시락을 만들어 모두 학교에 보내고 나면 분주했던 부엌이 난장판이었다.
나는 힘들어서 치우는 것을 잠시 미루고 앉아 남은 음식들의 잔재로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도시락 만드는 시간만큼은 많은 걱정과 두려움, 당면한 문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몰입할 수 있었으니
미션을 클리어하듯 재미있었으며 어쩌면 꼭 필요했던 바쁘고도 고마운 나의 일과였다.
낯 간지러워 도시락 편지를 쓰진 않았지만 가끔 밥 위에 완두콩 하트를 새겼고, 예쁜 포장에 신경 쓴 도시락을 싸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가끔 포스트잇을 붙였다.
Good Luck!
Have a good day~
Honey~ you're a good girl or a goodboy!
I'm proud of you!
Cheer up^^
물론 지금 하라면 못할 것 같은 그 도시락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담았었다.
악몽 같던 시간의 한 부분을 지난 일로 이야기하다 보니 그렇게 안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도시락이 사랑의 추억으로 남아 있으니 아픈 상처였던 흉터가 흐려지는 듯하다.
혹시 도시락을 만들면 사랑이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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