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한이야! “
옛말에 ‘대한이 소한집에 놀러 왔다가 놀라서 달아났다’ 고 했다.
소한의 추위가 매서웠단 뜻이다.
겨울에 들어가 소한이란 절기를 맞아 바짝 추워지면 체감온도가 무척 낮게 느껴져 소한에 닥치는 추위가 엄청 춥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주말이 지나면 그 달아났던 대한이가 여 보란 듯이 바람을 타고, 북극 한파를 몰아 온다고 예보되어 있다. 어제부터 돌풍 같은 바람이 불어 집의 흔들거림이 느껴진다.
바람에 아파트인 집이 흔들리니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솜털 같은 씨앗을 날리는 것처럼 옛 생각이 폴폴 새어 나온다.
신혼집인 아파트는 전매금지기간에 걸려있어 터무니없이 싼값에 전세로 들어있었다. 동서향의 집이어서 이른 아침에 해가 들어 아침잠이 많지만 밝으면 잠을 못 자는 나는 힘들었고, 서향에 위치한 부엌에서 저녁준비할 때 다리가 엄청 뜨거웠고, 여름엔 음식 관리에 조금만 소홀하면 상하기 일쑤였지만 4년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앞 베란다에서 보면 놀이터가 있어 멀리에 앞동이 있었고, 오른쪽은 아파트가 없이 트여있어 멀리까지 보이는 작은 집이지만 답답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파트가 전매금지 기간이 풀리면서 원하는 만큼의 전세가로 올릴 수 없으니 집주인은 “다음 달에 외국 살던 조카가 들어와서 살아야 해서요”라고 타협의 의지는 한 톨도 없으며 한 달 만에 나가라는 뜻을 전해 왔다. 8개월 차 임산부였던 나는 청천벽력 같았다. 당시 대기업을 다니던 남편은 고심 끝에 대출을 왕창 내고 쫓기듯 속전속결로 옆동의 집을 사게 되었었다. 계획에 없던 첫 집 마련이었지만 집을 사야 이사 다니지 않고 애들이 크도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결정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백일쯤 지나 제정신이 들었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앞도 아파트, 오른쪽도 아파트, 왼쪽도 아파트였다.
‘이것은 닭장인가?’
마치 저 많은 창문들이 모두 내 집과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낮에도 밤에도 블라인드를 열 수가 없었다. 23개월의 차이지만 햇수로 보면 연년생인 어린아이 둘과 외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sns가 활성화되었던 시기도 아니니 답답하고 고립된 시간이었다. 나는 혼자의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지만 말을 하루종일 하는데 대화다운 대화는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 몸이 힘든 것보다 괴로웠고, 족쇄 같은 대출을 얻은 남편은 새벽같이 나가 밤 12시가 넘어야 들어왔다. 어떤 땐 2시에 들어왔는데 3시에 교대로 실험실을 지키던 연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임님, 이거 이상합니다.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1시간도 채 못 잔 남편은 한걸음에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우린 둘 다 똑같이 너무 삶이 고되고 치열했기에 내가 독박육아에 대한 투정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한 날엔 블라인드를 조금 열고 전면 아파트와 오른쪽 아파트 사이로 살짝 보이는 팔을 뻗어 가늠해 보면 10Cm만큼의 하늘을 바라보며 “후우~” 소리를 내면서 숨을 크게 쉬었다. 그것은 나의 숨구멍이었다. 그 숨구멍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대로 닭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 사는 집을 선택할 때 시야가 답답하지 않은 곳을 고르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거실에 앉으면 창을 통해 전면 시야를 방해하는 아무 건물이 없이 저 멀리 산의 전경이 보이면서 적당한 높이의 산이어서 하늘이 1/3쯤 보인다. 나의 조건에 완벽히 맞는 풍경화를 갖은 집을 만났고 우리 결혼생활의 두 번째 집이 되었다. 처음에 계약했던 전망 좋은 이 집은 몇 년 후 왼쪽 삼분의 일 만큼에 아파트가 지어졌다. 처음엔 기분이 안 좋았지만 꽤 먼 거리의 아파트 불빛은 깜깜한 밤에 깨어있어도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게 해 주니 제법 괜찮다.
<나의 해방일지> 란 드라마를 1회를 보고 그만두었다. 다시 보려 시도했으나 4회를 보고 그만두었다. 나의 편협한 관점은 후미진 경기도에 살며 출퇴근을 하는 남매들을 보는 것이 내 아이들 같이 감정이입이 되어 미안했다. 힘들게 통학하며 대학을 마치고, 서울로 직장을 얻어 작은 오피스텔로 독립을 한 첫아이가 말한다.
“엄마 아빠가 계속 여기 살면 좋겠어. 집에 오는 게 힐링이 되고 너무 좋아”
아이는 휴가 때도 휴양지도 아닌 이 집으로 온다.
”엄마도 이곳이 좋아 “
하지만 아직은 운전이 가능해서 괜찮은데 더 나이를 들면 어떨까 싶긴 하다.
요즘 아파트치곤 아주 높은 것도 아니지만 태풍이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맨 몸으로 바람을 맞는 최전선의 내 집이 흔들려 조금은 무섭지만 번잡한 도시가 싫은 나는 요즘은 이곳에 뼈를 묻을까 고민 중이다.
“서울로 이사 갈 돈이 없어선 아니고?”
그렇게 물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서울이 아닌 풍경 좋은 집에 사는 탓에 대한이 몰고 오는 북극한파 속으로 새벽밥 먹고 나가야 하는 아이가 걱정이고, 다음 주는 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고생이 많겠다.
2024년 1월 20일. 절기 대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