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버릇이 여든 가겠다
고요함이 좋다.
뭔가 소리가 많아지면 어질어질 멀미가 난다.
얼마 전 냉이 다듬다 멀미 난다고 쓴 글이 생각난다. 난 멀미 날 일이 왜 이렇게 많을까?
듣기 싫은 소음만이 아니고, 아름다운 음악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심지어 나의 말소리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소리에서 피로감을 많이 느껴 때때로 깊은 동굴에 들어가고 싶어 진다.
나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없다. 그 물건을 귀에 낀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선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럴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도 않지만 기회가 되면 나만의 깜깜한 동굴로 들어간다.
동굴 속 어두움은 집중력을 배가 시킨다.
동굴 속에는 고요의 바다가 펼쳐져서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소리가 없는 것들이다.
비누와 산책을 하고, 요리를 하고, 몇 안 되는 식물을 키우고, 운동도 방구석에서 혼자 한다.
뜨개질을 하고, 책을 읽고, 퍼즐 맞추기를 하고, 혼자 드라마를 보며...
요즘은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혼자의 시간인 새벽에 글을 쓴다.
드라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혼자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듣는 말이 있다.
“저 대사가 들려?”
난 볼륨을 3 이상 키우는 일이 없다. 소리가 커지면 화면에 집중이 안되고 오히려 안 들리는 것 같다.
보통의 우리 집 사람들은 볼륨을 8-10 정도로 켜고 TV를 보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하다.
음악의 역할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상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없다면 감동과 효과는 반감되기 때문에 음악에 신경 쓰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는 거슬리고 완성도가 떨어져 재미가 없다.
그러나 돌비 시스템 빵빵한 극장을 가지 않는다. OTT에 풀리면 소리를 나지막이 켜고 본다.
심장에 닿도록 쿵쿵 베이스를 울리지 않아도 음악은 영상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감동을 준다.
말소리는 놓쳐도 장면을 놓치는 건 용서가 안되어 돌려서 꼼꼼히 보느라 완결된 작품을 보는 것도 오래 걸린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 좋은 배우를 좋아해서 개인적으로 배우 서현진이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아이돌의 음악도 듣고 베토벤의 웅장한 음악도 듣는다. 공연장이 아닌 기계인 스피커를 거쳐 나오는 소리는 크지 않게 듣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 말을 안 하는 걸까?
고요함이 좋아서 말을 숨기는 걸까?
말 대신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돌아가고, 예민한 오감(五感) 탓에 쉴 새 없이 신경이 곤두선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집안에서 내내 종종걸음을 하며 손을 쉬지 않는다.
내가 하루종일 집에서 무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저녁이 되면 어찌나 피곤한 지 5분 컷으로 잠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아예 말을 안 하는 건 아니고, 때론 쉴 새 없이 말할 때도 있다. 나중에 진이 빠지긴 한다.
친구들과 굉장히 좋은 스피커가 있는 카페를 종종 간다. 그곳에 가면 음악에 묻혀 마음이 열린 대화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숲 속에 나무를 만지고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계절에 따른 나무의 변화를 느끼고 어제는 없던 새로 피어난 꽃을 보고 카키색 사파리 복장을 하고서 새소리가 들리는 숲 속을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가만히 듣던 친구가 말한다.
“월든이네”
고백하자면 몇 년 전에 월든을 큰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지만 사실 나는 읽지 않아 내용을 모른다.
언젠가 내가 숲 속에서 뛰어다니고 있으면 친구들이 찾아와 재잘재잘 수다로 숲을 시끌벅적 채우며 일탈을 할 것 같은 재밌는 모습도 떠오른다.
어쩌면 식물을 좋아하지만 벌레를 무서워하니 숲이 아니고,
여러 번 보았던 영화 <안경>에 나올 것 같은 바닷가에서 눈을 감고 바람소리와 파도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하는 상상은 슬며시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그런 날에 대한 꿈을 꾸고, 희망한다.
나는 고요하고 조용함 속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이 좋다.
고요 속에서 몰입하여 생각하고 허부적 거리는 일이 즐겁다.
조용히 사부작 거리지 않고, 꽤 열정적으로 허부적 거린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조용해서 “자니?”하고 보면 몇 시간이고 혼자 방 안에서 어찌나 잘 놀고 있는지 신기했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세 살 버릇이 곧 여든을 가게 생겼다.
봄의 바다는 하루종일
꾸벅꾸벅 졸고있다
영화 <안경>